본문 바로가기

역사의 향기

여수 충민사

 햇볕이 쨍한 날씨에 바람도 봄바람처럼 살랑거리는, 겨울날씨답지 않은 2월의 날씨였다. 진남관에서 충민사로 출발하기전 오른쪽 앞 타이어에 바람이 줄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놀란 마음에 충민사로 가면서 차량정비소를 찾았으나 남의 동네라 쉽게 찾지 못해 골목길을 돌아야만 했다. 정비소에서 바퀴를 돌려보니, 아주 큰 못이 박혀 있었다. 출발전 집앞 주유소에서 공기압을 체크할 때 앞바퀴에 바람이 빠져 있어 이상하게 생각만하고 공기보충만 했었는데, 큰일 날 뻔 했었다.  행여 고속도로 주행 중 바람이 빠져버렸다면 큰일날 뻔 했을 텐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안고 충민사 앞에 다달았는데, 충민사는 양지바른 산자락 아래 단정하게 모셔져 있었다. 주차장까지 예쁘게 준비되어 있어서 상쾌한 기분으로 경내로 들어갔다. 충민사는 크게 두 영역으로 나뉘었는데, 입구 주변은 유물관과 공원으로 단장되어 있었고, 그 위에 단촐하게 지은 충무공 사당이 모셔져 있었다.   

 

  그러고 보면, 박정희 정권 때 중수한 아산 현충사는 조선조 왕의 신하였던 장군의 사당으론 너무 거대하여 당대의 정치적 꼼수가 지나쳤음을 느끼게 한다. 나라 위한 장군의 충절을 어디에 비할데 있을까마는 장군을 기린답시고, 조선시대 군왕의 사당보다 더 크게 콘크리트로 사당을 새로 지었다. 그리고, 장군의 고택곁에 살던 마을 주민들을 강제로 추방하고 그 일대를 성역화하여 정원을 만들고, 충무공 사당 축대 바로 아래 금송을 심었다. 그런데 그 정원이 일본식 정원이라는 것과 기념식수한 금송이 일왕을 상징한다는 사실은 놀라움을 뛰어넘어 참담한 심정을 들게 한다.  진실로 극일을 위한 이땅의 지성들이 살아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장군의 넋이 오늘의 현실을 굽어보신다면 무어라 하실지... 

  규모의 크기가 정성을 능가할 수 없다. 천박한 배금주의와 꼼수가 충무공 고택에 스며들어 오히려 장군을 욕되게하고, 민족의 정기를 흐렸으니 바로 잡을일이다.

 

  장군께서 지니시던 검에 새긴 글씨가 "三尺誓天山河動色 一揮掃蕩血染山河((삼척서천산하동색 일휘소탕혈염산하)"였는데, 의미 그대로 "3척의 검을 들어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강이 떨고,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였는데, 아직까지 쓸어버리지 못한 왜적의 잔재가 도처에 물들어 있어 장군의 한이 아직도 우리 곁에 떠돌 것 같아 가슴 아프다.

 

 

  이순신 장군 전사 후 1601년(선조34년)년에 어명으로 세운 충무공을 기리는 최초의 사당이다. 통영의 충렬사보다 62년, 아산 현충사보다 103년 이르다.  충민사 유물관, 앞뜰에는 당시의 총포류가 전시되어 있다.

 

  유물관 입구의 부조물

 

  조선 장군의 군모, 군복

 

  왜장의 투구와 갑옷, 왜장들은 왜 흉칙한 가죽 가면을 썼을까

 

 

    오른쪽이 충민사, 왼쪽이 석천사

 

  

 유물 전시관에서 사당으로 가는 길, 입구의 홍살문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과, 충민사의 정문인 숭모문.

 

 

  충민사 중문인 충의문

 

  충무공 사당인 충민사

 

 

 

 

 

  충민사 왼편에 있는 석천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의 말사이다. 1195년(고려 명종 25) 지눌(知訥)이 창건하였다. 절 이름은 근처 큰 바위 밑에서 나오는 석천(石泉)이라는 샘에서 유래한다. 1601년(조선 선조 34) 옥형(玉炯)과 자운(慈雲)이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옥형과 자운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이순신을 도운 승장(僧將)들로서, 자운은 충무공이 지휘하던 배에 올라 공을 세웠고 옥형은 군량미를 조달했다고 한다. 이순신이 전사하자 자운은 백미 6백 석으로 노량에서 수륙재를 지냈고 여수충민사(麗水忠愍嗣)에서 제사를 올리기도 했다. 한편 옥형은 충민사 곁에 초당을 짓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다 입적했다고 한다. 자운과 옥형이 이 절을 창건했다는 설은 이 때 지은 초당을 근거로 하는데, 당시에는 이미 이 절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여수시 봉산동 간장게장 골목에서 아침식사를 했었다. 여수 돌게 간장게장 정식 1인당 8000원, 간장게장은 한 번 더 리필해 준다.  돌게 간장게장이 맛은 있었는데, 좀 짰다. 게장을 먹고 물을 어찌나 먹었는지...  TV에 소개된 맛집이라고,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주차장이 좁아 차대기가 힘든 것이 단점이다.  팁으로, 봉산동은 모텔들이 밀집된 곳이어서, 취향에 맞는 숙소를 찾을 수 있다.

 

Photo by Sony a6000, ILCE-6000L/B. E PZ 16-50mm

 

충민사:  여수시 덕충동 1808

'역사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산유적지  (3) 2015.05.07
여주 명성왕후 생가  (6) 2015.03.14
부여 부소산  (2) 2015.02.07
공주 무령왕릉과 박물관, 한옥마을  (3) 2015.02.06
김좌진 장군 생가  (2) 2015.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