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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여주 명성왕후 생가

  대한제국 고종황제비 명성왕후. 우리 근대사의 비극을 한 몸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몰락한 양반 자식으로 태어나 나라의 최고 지위에 올라 권력을 제멋대로 탐하며 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격변하는 외세의 격랑 속에 일본 자객들에게 경복궁 옥호루 침소에서 시해되어 시신까지 불태워졌다. 한 나라의 왕비로 당한 굴욕과 수치는 그대로 우리 역사에 남는다. 결국 대한제국은 왕비 시해 후 10년 만에 힘도 한 번 못써보고 왜적들에게 국권을 송두리째 내주고 말았다. 제 힘을 기르지도 못하고 눈앞의 권력을 탐하던 시아비 흥선대원군과 며느리 민왕후의 다툼과 이들을 둘러싼 권력세도가들의 제집 안 배 불리기가 망국의 원인이었음은 분명하다. 나라를 통치할 능력도 없던 고종, 역시 그를 왕으로 낙점했던 궁중 여인들의 제 집안 챙기기를 위한 권력쟁탈의 산물이기도 하다.  "나는 조선의 국모다."라고 외쳤다는 뮤지컬 대사의 카피가 오히려 부끄럽다. 조선말기 민왕후를 등에 업은 민씨 세력들의 발호를 조선의 국모란 말로 덮을 수는 없겠다.  왜적들의 총칼 앞에 맨손으로 독립만세를 외쳤던 삼월의 하늘 아래 민왕후의 생가는 변덕스러운 봄날씨처럼 쓸쓸했다.  

 

명성왕후 생가 전경

 

바깥채에서 들여다본 안채 마루 

 

명성왕후 초상이 모셔진 안채 대청마루

 

대청마루에 모셔진 명성왕후 

 

안채에서 내다본 바깥 풍경

 

생가 자료 사진 

 

생가 오른편에 세워진 숙종조 인현왕후 아버지인 민유증의 신도비, 비석 받침의 거북이 머리를 돌리고 있는데 그 방향으로 70m 거리의 산 위에 묘가 있다. 민유중은 명성왕후의 6대 조이다.

 

정교한 비석받침의 돌조각

 

묘로 올라가는 산등성에서 내려다본 왕후의 생가

 

민유증의 묘, 석재를 다듬어 사각으로 틀을 만들고 그 위에 큰 봉분을 올렸다.

 

특이하게도 좌우에 두 부인을 둔 합장묘였다. 명성왕후는 민유중의 6대 후손이다. "국구여양부원군 시 문정민공 유중지묘, 증 해풍부부인 이씨 부우, 증 식성부부인 송씨부좌" "임금의 장인 여양부원군 시호 문정공 민유중의 묘,  증(죽은 뒤 내리는 관직) 해풍부부인 이씨 오른쪽에, 증 식성부부인 송씨 왼쪽에 합장하였다." 식성 송씨는 현재의 해주 송씨로 짐작되고 식성부는 고구려 때 황해도 안주지방을 이른다. 

 

무덤의 후측면

 

  명성왕후는 여흥 민씨로 여주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이름은 자영이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그녀가 태어난 집안은 숙종을 두고 장희빈과 삼각관계를 겨루었던 왕비, 인현왕후를 배출한 민씨가였다.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은 인현왕후의 아버지였던 민유중의 5대손이었다. 이런 가계를 통해 볼 때 명성왕후 집안은 당색으로는 서인계였고 아버지 민치록이 세도정치기인 철종 때 음서로 관직에 오른 것을 보면 그때까지도 꽤 내로라하는 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민치록은 음서로 관직에 올라 지방관과 중앙의 중간관리 벼슬을 했으며 훗날 명성왕후가 되는 딸아이 하나만 남긴 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8살에 아버지를 여읜 이후 명성왕후는 어머니와 함께 여주를 떠나 서울로 올라와 감고당(6대조 민유중의 집으로 당시 민치록이 소유하고 있었다. 감고당이란 이름은 영조가 지어주었다)에서 기거하였다. 당시 서울에 집을 소유한 것을 볼 때 집안 형편은 꽤 넉넉했던 것 같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대를 이을 사내아이가 없는 집안은 이미 몰락을 예정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12촌인 민승호가 양자로 들어와 집안의 제사를 맡기는 했지만, 사실상 명성왕후는 어머니와 단둘이 외로운 성장기를 보냈을 것이 분명하다.

  민자영은 어렸을 때부터 무척 총명하여 주변에 칭찬이 자자했다고 한다. 특히 훗날 왕비 자리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친척 아주머니 민씨 부인의 마음에 퍽 들었다. 이 민씨 부인은 바로 당시 아들 고종을 앞세워 조선의 실권을 쥐고 있던 대원군의 아내, 부대부인 민씨였다. 부대부인 민씨는 민자영의 아버지 민치록의 양자로 들어간 민승호의 누나였다. 그녀는 둘째 아들 고종의 왕비로 자신과 친인척관계이던 민자영을 적극적으로 대원군에게 추천하였다.

  대원군은 민자영의 친정이 단출한 것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 왕비를 내세운 안동김씨의 외척 세도정치를 무척이나 경계하던 대원군은 가문적으로는 그다지 빠지지 않으나 주변에 힘이 될 사람은 별로 없는 민자영을 전격적으로 왕비로 간택했다. 물론 제대로 된 왕비 간택 절차를 거쳤지만, 이 간택 절차 이전에 대원군은 이미 아비 없고 남자 형제 없는 민씨가의 외로운 처녀를 며느리로 점찍고 있었다. 몰락한 친정을 둔 왕비가 정치에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네이버 캐스트>

  묘에서 내려다본 생가. 명성왕후의 생가는 묘를 돌보는 집이었던 셈이었다. 민자영은 이곳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 한양으로 올라가 민유중의 집(인현왕후의 사가)에서 살다가 이웃에 살던 고종의 어머니 여흥부대부인이 추천하여 왕비로 간택되었고 한다. 고종의 어머니 역시 민유중의 6대손으로 황후와 12촌 사이다. 친척 언니가 시어머니가 되었다.

 

명성왕후 기념관

 

기념관 안에 전시된 왕후의 아들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 실권도 없던 허수아비 황제로 일제에 농락당하다 53세로 운명했다. 

 

아버지와 마누라 사이에서 기도 못 펴고 눌려 지내다 나라까지 빼앗긴 황제, 고종

 

명성왕후 관련 궁중 유물

 

일본 자객들이 시해할 때 사용한 칼, 모조품. 칼집에는 一瞬電光刺老狐(일순전광자노호)라 씌었다. "한 순간에 번갯불처럼 늙은 여우를 찔렀다." 늙은 여우는 민왕후. 작전명은 '여우사냥'이었다.

 

자객후손들이 방문하여 적은 방명록

 

방문단의 참배, 자료사진

 

기념관 앞에 있는 연못과 정자

 

민유증의 집으로 인현왕후의 사가였던 감고당, 명성왕후가 나이 여덟에 아버지를 여의고 한양 안국동으로 이사하여 왕비 책봉 때까지 살았던 집. 한양에 있던 집을 해체하여 이곳에 복원했다.

조선시대 제19대 숙종이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친정을 위하여 지어준 집이다. 인현왕후의 부친인 민유중(閔維重)이 살았으며, 인현왕후가 폐위된 후 이곳에서 거처하였다. 이후 대대로 민씨가 살았으며, 1866년(고종 3) 이곳에서 명성왕후가 왕비로 책봉된다. 왕비로 책봉된 명성왕후는 과거 인현왕후의 일을 회상하여 '감고당(感古堂)'이란 이름을 붙였다. 본래는 서울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쪽에 있던 것을 도봉구 쌍문동 덕성여자대학교 학원장 공관으로 옮겼으며, 이후 여주시의 명성왕후 유적 성역화 사업에 따라 경기도 여주시 명성왕후의 생가 옆으로 이전·복원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바깥채

 

안채

 

안채에서 바깥채로 나가는 중문

 

밖으로 나가는 대문과 행랑채

 

관련포스팅 http://fallsfogs.tistory.com/153

Photo by Sony a6000, ILCE-6000L/B. E PZ 16-50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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