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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다산유적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소재 다산 유적지, 그동안 양평에서 서울 가는 두물머리 부근 국도변의 안내 팻말만 보고 지나쳤었었다. 다산 생가가 남양주에 있다고 해서 다른 곳인 줄만 알고 있었다. 정약용이 태어나고 사후에 몸을 의탁한 이곳은 본디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였는데 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가 되었다. 팔당댐 건설로 넓은 호수가 된 두물머리의 한강 쪽 꼭짓점이었다. 서재와 독서, 침잠하기에 적당히 알맞고 좋다 하여 여유당(與猶堂)이라 불렀다는 본래 생가는 홍수에 떠내려 간 것을 1975년에 그 자리에 복원하였다. 생가의 뒷동산엔 묘소가 있고, 오른쪽에 사당, 왼쪽에 생전의 유품을 수집·정리한 유물전시관이 있다. 유적지 앞 한강변에 공원이 조성하여 그 일대가 아름다운 생태공원이 되었다.

 

  다산 정약용은 18세기 조선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한국 최대의 실학자이자 개혁가이다. 실학자로서 그의 사상은 개혁과 개방을 통해 부국강병(富國强兵)이었다. 정약용의 가장 큰 후견인은 정조였다. 그는 정조의 최측근으로서, 희릉직장(禧陵直長)으로부터 출발하여 가주서(假注書), 지평(持平), 교리(校理), 부승지(副承旨) 및 참의(參議) 등으로 승승장구하였다. 주교사(舟橋司)의 배다리 설계, 수원성제와 기중가(起重架) 설계 등 빛나는 업적도 많았다. 하지만, 정조가 승하한 이듬해 1801년(순조 1) 신유사화가 일어나면서 주변 인물들이 참화를 당했고, 손위 형인 정약종도 참수를 당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정약용은 그해 2월에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11월에는 강진으로 옮겨졌다. 18년 동안 긴 강진 유배생활의 시작이었다.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마현으로 돌아온 것은 1818년 가을, 그의 나이 57세 때였다. 1836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고향인 마현에서 자신의 학문을 마무리하여 실학사상을 집대성하였다. 귀양살이는 그에게 깊은 좌절도 안겨주었지만, 최고의 실학자가 된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귀양살이라는 정치적 탄압까지도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여 학문적 업적을 이뤄낸 인내와 성실, 그리고 용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의 방대한 저작은 평생을 통하여 중단 없이 노력의 결과물로 평가받는다.

 

  다산 정약용 선생 유적지 정문

 

 다산 묘역으로 가는 길에 홍살문이 세 개나 서있었다.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정조대왕의 수원화산 융릉참배를 위해 노량진에 띄웠던 배다리를 형상화하고 그 위에 홍살문을 세웠다.

 

 다산 생가, 바깥채, 당호가 '여유당'이다.

 

생가 안채

 

생가 바로 뒷동산에 모셔진 다산의 묘

 

 다산의 사당인 문도사.  다산의 시호는 '문도공', 오른쪽 계단 위의 동산이 문도공 다산 선생의 묘소이다.

 

다산 기념관 안에 재현된 선생의 생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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