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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독립운동가 이상룡선생의 생가 안동 임청각

  안동시내에서 하룻밤을 잤다. 태화동에 모텔들이 많았는데, 처음으로 무인모텔에 숙박하는 진기한 체험을 했다. 방처럼 나눠진 1층 주차장에 차를 대면 전동 셔터가 닫히고, 계단으로 2층에 올라 객실입구 모니터를 터치하며 계산을 하면 객실에 들어갈 수 있다. 놀랍게도 머리맡에 있는 스위치를 켜면 천정 가운데 사각 스크린이 열렸다. 세상 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에 놀라며, 이 장치를 고안한 건축가의 창의성에 탄복했다. 아침 일찍 숙소를 나와 근거리의 임청각을 찾았다.  아쉽게도 날씨가 잔뜩 흐려 빗방울이 곧 떨어질 것 같았다.

 

  작년에 문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독립운동가 이상룡선생의 생가인 임청각을 언급하여, 그때부터 방문을 벼뤘다가 이제야 찾아오게 되었다. "임청각은 1519년 조선 중종 때 이명이 건립한 건물로 99칸 양반집이다. 이 집은 석주 이상룡 선생을 비롯하여, 선생의 아들, 손자 등 독립운동가 9 명을 배출하는 등 3대에 걸쳐서 독립운동을 한 독립운동의 산실이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 1월 전 재산을 처분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여 만주 망명길에 올라 독립운동기지인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웠으며, 1925년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맡아 독립운동계 분파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선생은 망명 직전 사당에 올라가 신주와 조상 위패를 땅에 묻고 나라가 독립되기 전에는 절대 귀국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고 한다. 만주 망명길에 오른 2년 뒤인 1913년에는 아들 이준형에게 “국내로 들어가 임청각을 처분하라”라고 하였으며, 그 후 국내로 들어온 아들 이준형이 “임청각을 팔겠다”라고 하자, 문중에서 이를 말리면서 독립운동 자금 500원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임청각 홈페이지 소개글 발췌>

 

  임청각을 눈에 가시처럼 여기던 일제는 임청각을 차마 훼손하진 못하고 임청각 바로 앞에 철로를 놓아 맥을 끊어 버렸다. 이 같은 비열한 행위는 경복궁을 비롯해서 경주 김유신 장군묘, 태종무열왕릉 앞 등에서도 나타난다.  향후 임청각 앞 중앙선 철로를 옮기고 옛 모습으로 복원하여 민족의 정기를 잇는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는 일을 옳은 일이다. 임청각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곳곳에 일제가 훼손한 유적들을 하루빨리 복원해야 할 것이다. 

 

고성이씨 종택과 임청각을 행여 높은 곳에서 조감할 수 있을까 해서 옆산에 올라갔다가, 우거진 숲 속에서 날아든 땅벌에 왼쪽 어깻죽지 아래 등판을 쏘였다. 어찌나 따갑고 쓰라리던지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떨어지는 빗방울에 마음이 조급해져서 숲을 헤치다가 땅벌집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자세를 낮추고 재빠르게 도망친 탓인지, 한 방으로 끝나 불행 중 다행이었다. 땅벌에 쏘여 죽는 사람도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핏 뒤돌아보니 세 마리가 내 쪽으로 날아들던데 어쩌면 떨어지는 빗방울 때문에 공격을 멈췄는지도 모르겠다. 흐리고 비 오는 날씨만 해도 안타까운데 벌침까지 맞고 말았다. 일부러 봉침 맞는 사람도 있던데, 쓰라림을 약으로 다스리기로 마음먹었다. 친구들이 벌 쏘인 곳이 많이 부풀어 올랐다고 걱정하며 편의점에서 약을 사다 발라 주었다.       

 

  임청각 정문  

 

  군자각으로 불리는 임청각 정자

 

사당

 

  안채

 

  안채 아래 마련된 작은 전시관

 

  임청각 이웃에 있는 안동 고성이씨 종택, 석주 이상룡 선생의 관향도 고성 이씨이다.

 

  고택 앞을 가로막고 있는 높은 울타리는 중앙선 철로의 소음을 막는 방음벽이다. 철로가 철거되면 임청각과 마찬가지로 시원하게 탁 트인 본래의 전망을 회복할 것이다.

 

  고택 앞에 있는 7층 전탑,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벽돌로 쌓은 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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