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에서는 공산성 축제가 한창 열리는 중이다. 9월 13일부터 10월 10일까지 공산성을 중심으로 수변 공원, 미르섬, 금강, 공산성 등에서 공주 문화제가 열린다. "2024 공산성 미디어 아트"가 축제의 타이틀이라 곳곳에 LED등과 대형 스크린들을 설치했다. '미디어 아트'축제라 야간에 집중된 탓에 한낮에 들린 나로서는 그저 변죽만 울리고 스쳐 지날 수밖에. 수변공원 넓은 4개의 주차장이 모두 만차일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수변공원에서는 주로 토속 농공산품들을 판매하고 있었고, 야와 대형 공연장과 시름장, 먹거리 장터들이 설치되어 난장을 이루었다. 수변공원을 지나 미르섬으로 가려니 입장료를 받았다. 일반인 7000원, 가격이 비싸다. 작년까지만 해도 무료로 건너 다니던 곳이었는데, 축제 기간임에도 입장료를 받는다니 놀랍다. 티켓에 찍힌 4000원은 지역 화폐로 현금처럼 쓸 수 있다니 입장료는 3000원인 셈이다. 그래도 내 생각엔 과하다 싶었다. 공산성 입장료가 3000원이라는데, 공산성 자체가 옛날 성곽을 고증에 따라 복원한 것이 아니었고 성문마저 우리나라 전통방식으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주 백제시대는 64년이다. 개로왕 때 고구려군에 수도 한성이 함락되자 문주왕 때 남하하여 공산성을 쌓고 수비를 강화하였다. 웅진(熊津-곰나루->공주)은 북으로는 차령산맥과 금강으로 외부와 차단되어 있고, 동으로는 계룡산이 가로막고 있어 고구려의 남침을 막을 수 있는 천연적인 방어의 요충지였다. 또한 한강을 대신한 금강은 서해로 통하는 유일의 내륙 수로로 수륙교통의 요지일 뿐 아니라 호남·내포평야를 끼고 있어 한강 유역을 잃은 백제가 제2의 수도로 정할만한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웅진은 문주왕 원년에 수도로 정해져서 삼근왕·동성왕·무령왕을 거쳐 성왕 16년(538) 부여의 사비성으로 천도하기까지 5대 64년간 백제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웅진 천도 후 왕들의 계속된 죽음으로 인해 정치권은 계속 동요하였다. 이를 탈출할 돌파구가 필요했는데, 그것은 도읍을 옮기는 것이었다. 웅진은 외부로부터 고립되어 있어 방어하기에는 편리했으나 밖으로 진출해 나가기 어려운 지형이었고, 한 나라의 수도로서도 협소했다. 따라서 중흥을 위한 새로운 역사의 중심지가 필요했다. 금강 가에 위치해 산으로 둘러싸인 사비는 방어에도 적합하였을 뿐 아니라 넓은 평야를 끼고 있어서 호남평야를 경영하고 가야 지방으로 진출하는 데도 유리하였다. 사비 천도는 성왕 때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이전의 왕들에 의해 계획된 것이었다. 성왕은 부소산 남쪽에 왕궁을 마련하고 부여의 외곽에 나성(羅城)을 쌓아 본격적인 도성의 모습을 갖추었다. 사비 백제는 122년간 번성했으나 538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당나라에 항복함으로써 그 운명을 마쳤다.
사비성이 함락되었을 때 의자왕은 공산성으로 피난하여 반격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신하인 공산성주 예식진에게 배신당하여 사로잡힌 몸이 되어 나당연합군에게 항복했다는 슬픈 이야기가 숨어 있다.
미르섬의 LED 국화를 비롯한 다채로운 꽃밭
금강에 띄운 돛단배, 돛에 LED등을 달았다.
미르섬에서 금강을 건너 공산성으로 건너 가는 부교
부교 주변에 띄운 다양한 모양의 유등
공산성 북문인 공북루
미르섬과 공산성을 있는 부교
공산성 안, 공북루 앞 행사장, 1971년 발굴한 무령왕릉 덕에 무령왕이 행사의 중심인 듯, 예행연습이 한창이었다.
상여
더위를 피해 공북루 누각 안에서 잠시 리허설 구경을 하다가 부교를 통해 되돌아왔다.
미르섬
수변 공원 야외무대
장광덕이 진행하는 여성 씨름대회
웅진 백제 64년
문주왕(475~477년)은 개로가 왕위에 오를 때 그를 보좌하여 상좌평에까지 올랐기 때문에 이미 정치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성격은 우유부단하였다. 폐허가 되어 고구려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는 한성에서의 생활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그래서 문주왕은 즉위한 해 10월에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었다.
웅진은 북으로는 차령산맥과 금강으로 외부와 차단되어 있고, 동으로는 계룡산이 가로막고 있어 고구려의 남침을 막을 수 있는 천연적인 방어의 요충지였다. 또한 한강을 대신한 금강은 서해로 통하는 유일의 내륙 수로로 수륙교통의 요지일 뿐 아니라 호남·내포평야를 끼고 있어 한강 유역을 잃은 백제가 제2의 수도로 정할만한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웅진은 문주왕 원년에 수도로 정해져서 삼근왕·동성왕·무령왕을 거쳐 성왕 16년(538) 부여의 사비성으로 천도하기까지 5대 64년간 백제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웅진으로의 천도는 세밀하게 계획된 것이 아니라 난을 피한 갑작스러운 것이었으므로 웅진 도읍기 초기의 정치적 상황은 불안의 연속이었다. 문주왕 이후 즉위한 삼근왕은 해구의 반란을 제압한 이듬해에 죽는다.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없으나, 정상적인 죽음이 아니었던 것만은 추측할 수 있다. 16살의 나이에 죽은 삼근왕은 후사가 없었다. 결국 왕위는 동성왕(東城王, 479~500년)에게로 돌아갔다.
동성왕은 문주왕의 아우 곤지(昆支)의 아들이다. 고구려의 침입을 피해 남쪽으로 수도를 옮긴 백제 왕실은 천도 초기의 불안정을 타개할 방안을 모색하였다. 삼근왕대의 정변을 수습하며 즉위한 동성왕은 정치적인 안정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지방의 유력 세력들과 연대를 도모하였다. 실추된 왕권 강화를 위해 재위 12년에는 남조와 통교를 재개하여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고, 15년에는 신라의 이찬(伊湌) 비지(比智)의 딸과 결혼하여 고구려에 대해 나·제 동맹 체제(羅濟同盟體制)를 구축하게 된다. 신라가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을 시해하기 전까지 두 나라는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웅진 도읍기 초기 왕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은 동성왕의 적극적인 정책으로 인해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동성왕은 점차 정사를 등한시하게 되었다. 백성들을 구제하자는 신하들의 건의는 듣지 않은 채 대궐 동쪽에 임류각을 세우고 연회를 즐겼다. 동성왕의 말로는 예견된 것이었다. 재위 23년 11월 사냥을 하던 동성왕은 큰 눈에 길이 막혀 마포촌에 머무르게 되는데, 이때 위사좌평인 백가(苩加)가 사람을 시켜 왕을 시해하였다. 백가는 좌천되어 가림성으로 파견된 것에 원한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웅진 천도 후 왕들의 계속된 죽음으로 인해 정치권은 계속 동요하였다. 이를 탈출할 돌파구가 필요했는데, 그것은 도읍을 옮기는 것이었다. 웅진은 외부로부터 고립되어 있어 방어하기에는 편리했으나 밖으로 진출해 나가기 어려운 지형이었고, 한 나라의 수도로서도 협소했다. 따라서 중흥을 위한 새로운 역사의 중심지가 필요했다. 동성왕에 이어 즉위한 무령왕(武寧王, 501~523년)과 성왕(聖王, 523~554년) 대의 안정을 기반으로 백제는 재도약의 기회를 노릴 수 있었다.
무령왕은 백가에 의해 시해된 동성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는데, “신장이 8척이고 성격이 인자하여 백성들의 인심을 얻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무령왕 즉위 후 동성왕을 시해한 백가가 다시 가림성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무령왕은 우두성의 한솔(扞率) 해명(解明)을 시켜 백가를 잡아 그의 목을 베어 백강에 던졌다.
무령왕은 즉위하면서 고구려와 여러 번 충돌하였다. 그러나 재위 21년(521)에 양(梁)나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표문을 올려 “여러 번 고구려를 격파하여 비로소 그들과 우호관계를 맺어서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말하였다. 이는 웅진 천도 후의 불안을 어느 정도 수습한 자신에 찬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무령왕은 양나라로부터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이란 직함을 받는다. 왕이 재위 23년 만에 죽자 그의 시호는 무령이 되었다.
무령왕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명농(明穠)이 즉위하였다. 그가 바로 성왕(523~554년)이다. 성왕은 재위 16년 봄에 사비(泗沘)로 수도를 옮기고 남부여(南扶餘)로 국호를 개칭하였다. 백제 건국설화에서처럼 백제의 출발점이 부여였음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사비로 천도한 것은 문주왕 때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것과는 달랐다. 금강 가에 위치해 산으로 둘러싸인 사비는 방어에도 적합하였을 뿐 아니라 넓은 평야를 끼고 있어서 호남평야를 경영하고 가야 지방으로 진출하는 데도 유리하였다. 사비 천도는 성왕 때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이전의 왕들에 의해 계획된 것이었다. 성왕은 부소산 남쪽에 왕궁을 마련하고 부여의 외곽에 나성(羅城)을 쌓아 본격적인 도성의 모습을 갖추었다. 출처: <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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