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수원 팔달산 순환도로를 걸었다. 세월의 흐름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라는 시조의 구절은 맞는 말이 아닌 듯싶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란 말엔 수긍이 간다. 십 년은 길고 요즘은 오 년 정도로 시간을 줄여야 할 것 같다. 십 년이면 그야말로 상전벽해이다. 20대 일이 엊그제 같이 생생한데, 세월은 무심하다. 옛날의 모습을 반추하며 그 길을 걸었다. 팔달문에서 성벽을 따라 오를 때 중턱에서 만나던 홍난파 노래비는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그의 친일 행적이 거론된 후, 옛날보다 덜 감동스러웠지만 그런대로 반가웠다.
순환로를 따라가다 행궁 뒤 팔달산 약수터 부근에서 강감찬 장군 동상을 찾았으나 볼 수가 없다. 옆 벤치에서 쉬고 있는 노인께 물으니 모르겠단다. 하기사 요즘엔 도시 유목민이 많으니, 이 부근에 이십 년 이상 사신 분이 얼마나 되랴 싶다. 주변을 세심하게 살펴보니 동상 대신 약수터 옆에 단정하게 앉아있는 기와집 건물이 보였다. 그동안 팔달산을 오를 때 몇 번 보았던 것인데, 무심코 보아 넘겼었다. 핸드폰으로 검색해 본 결과, 바로 그 자리가 강감찬 장군의 동상이 있던 자리였다. 수원과 연고가 없는 강감찬 장군상은 인근 광교 공원으로 옮겨지고, 그 자리에 옛날에 있었다는 성신사를 지었다는 것이었다.
성신사를 둘러 보고 조금 지나니 도로 아래 넓은 공간에 정조대왕상이 있었다. 황금색 곤룡포를 입고 선 입상이었는데, 글쎄 내 눈에는 멋져 보이지 않았다. 외국 여행 중 거리에서 만나는 동상들은 역동적이고 윤곽이 뚜렷하여 깊은 인상을 받곤 하는데, 우리나라엔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것이 그저 두리뭉실하고 정적이다. 역동적인 모습은 표현할 수 없는 걸까. 한 때, 조각가를 동경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것이 마냥 아쉽다.
팔달산 중턱 순환도로
화성의 남쪽 성벽
성벽 옆 단풍나무
순환로를 따라 계속 걷다 보니...
약수터 옆에 단정한 건물이 있었다. 여기가 강감찬 장군의 동상이 있던 곳으로 2009년에 이 사당을 복원했다고 한다.
신주를 모시려면 제대로 하면 좋을 것을... 종이에 써서 비닐 테이프로 붙여 놓은 것이 오히려 안쓰럽다.
성신사를 지나 길옆의 푯말을 보고 찾아 내려갔다. 정조대왕 입상이 있는 곳... 어째 노력과 비용에 비하여 내 눈에 아름답게 들어오지 않았다. 정조대왕이 만든 신도시 계획으로 수원 신읍성인 화성이 탄생되었으니, 수원에서 정조대왕을 빼곤 도시의 역사를 날할 수 없겠다.
동상 뒷벽에 그린 화성전도
수원 신도시 건설 과정을 뒷벽 오석에 새겨 놓았다. 요약하면, 본디 '물골' 수원은 지금의 융건릉이 있는 화성시 화산지역이다. 본디 있던 읍성을 없애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그곳에 모시고 현륭원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곳 팔달산 동편에 수원의 새읍성을 새로 지었으니, 이곳이 바로 수원 화성이다. 그러고 보면 오늘의 수원시와 화성시가 위치가 바뀐 셈이다. 화성시에는 화성이 없고 옛날 수원 고읍성의 흔적만 있을 뿐이다. 수원 공군비행장 이전 문제로 경기도와 화성시가 서로 대립하고 있다. 융건릉 바로 위에 수원 제10 전투 비행단이 있다. 날마다 비행장에서 이륙하고 착륙하는 전투기는 수원시내만 비행하는 것이 아니다. 이착륙하는 비행기의 소음은 수원 세류동과 화성시 태안읍 모두 동일하다. 전투기의 회전 반경을 생각하면 수원시와 용인 기흥읍, 그리고 화성 신도시인 동탄까지 그 소음 범위 안에 들어간다. 공생하기 위해 협력해야 한다. 나만 생각한다면 우리나라 지방자치제는 없어져야 한다. 큰 나라 일개 현이나 주 정도밖에 되지 않는 좁은 영토 안에서 남북을 가르고 동서를 구분하며 발톱을 세워야 하겠는가.
순환도로에서 화성 밖으로 나가 성벽 바깥길을 따라 화서문으로 내려갔다. 성밖의 억새들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서북공심돈과 화서문, 그리고 멀리 빛나는 억새밭 위의 서북각루
photo by sony α6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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