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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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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욕의 역사가 서려 있는 남한산성 권력욕에 눈 먼 서인세력들이 쿠데타로 실리적 외교를 추구하던 광해군을 축출하고 능양군이던 인조가 즉위하면서 조선 왕조는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명분을 주장하며 오직 대명(大明)만을 사대하는 정책으로 몰아갔기에 두 번의 여진족의 침략을 받아 왕은 왕대로 치욕스러운 항복을 했으며, 백성들은 전란의 고통에 빠져 많은 사람들이 살육당하거나 삭풍이 부는 오랑캐 나라로 끌려갔다. 반정 후 논공행상을 빌미로 북방을 지키던 이괄이 난을 일으켜 훈련된 군사들을 잃은 것도 원인 중 하나라고 하지만, 이괄의 쿠데타로 공주까지 도망간 인조로서 국방을 강화하기보다는 장수들을 견제하는데 힘써, 나라를 지키는 군사력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었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난리가 나면 임금이 도망하는 것이 우리나라 지도자의 유..
남한산성 수어장대와 지화문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는 지휘소로 이름대로 말하면 임금을 지키는 장대란 뜻이다. 지휘소임에도 숲이 우거져 사방이 제대로 조망되지 않았다. 이층 누각으로 화려하고 웅장했다. 수원 화성장대보다 규모가 훨씬 컸으나, 기능과 외적 아름다움을 견준다면 화성장대보다 멋스럽지 못하다. 아래층 마루는 북쪽에 판자로 벽을 세웠다. 그리고 수어장대를 둘러싸고 담장을 둘렀는데, 담장 때문에 시야를 가리는 것으로 봐서 아마도 후대에 쌓은 듯하다. 수어장대 측면에 세운 무망루, 조선 영조가 병자호란의 치욕을 잊지 말자고 세운 것이다. 그 옆엔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기념식수하고 세운 사각 기념 표지석이 있다. 수어장대에서 나와 성벽을 따라 남한산성의 남문까지 걸었다. 성벽을 따라 걷는데 대부분의 길이 다듬어지지 ..
서울 원경 쾌청하여 가시거리가 좋을 줄 알았는데, 막상 멀리 바라보니 상황이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행궁에서 수어장대 방향으로 올라가선 산성 성벽에 기대어 남한산성의 서쪽 풍경들을 망원으로 몇 컷 찍었다. 잠실의 롯데 타워가 우뚝 솟아 위용을 뽐내었다. 남산 서울 타워도 밋밋한 도시 풍경에 제법 조화를 부렸고...... 한강 주변 롯데빌딩과 서울타워 북한산, 망경대와 백운대 인수봉이 삼각점을 이루었다. 도봉산 암봉들... 여의도 부근 인천방향 관악산
남한산성 행궁 간밤에 벼락과 우레소리가 요란하더니 아침엔 햇살이 쨍하게 빛났다. 가시거리도 상당해서 멀리 광교산 머리가 깨끗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조반 후 얼른 카메라를 챙겨 남한산성으로 갔다. 모란역에서 시내버스로 환승할 때, 인터넷 검색과 달라 약간 착오가 있었지만, 버스 앱과 정류장 안내표지를 참고해서 모란역 3번 출구에서 9번 버스를 타고 목적지 종범까지 갔다. 시내버스 노선이 구불구불해서 지체되긴 했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만큼 마음만은 편했다. 산성 안은 산성축제 준비로 한창 바쁜 듯, 한가운데 주차장은 차량을 통제하면서 천막들을 설치해 놓았다. 서서히 가을빛이 물들어간다. 눈부신 가을 햇살 속에 바람이 조금 찼으나, 이내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매표소에 들렸더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행궁 기와보수공사를 ..
남한산성 가을은 쓸쓸한 계절이다. 팔랑팔랑 낙엽 지는 모습만 봐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계절에, 날씨마저 을씨년스러워서 쌀쌀한 바람마저 옷깃을 여미게 했다. 고운 단풍들이 사라지기 전에 느껴보자고 떠난 산행이 남한산성으로 바뀌었지만 그런대로 아쉬움은 달랠 수 있었다. 평일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가을산성을 찾았다. 공사 중이었던 동문을 다시 보며 성벽을 따라 걸었는데, 양지바른 곳에선 이미 단풍들이 말라 오그라들었다. 산성 모퉁이 그늘진 곳에서나 아직 바래지 않은 단풍들로 위안을 삼으며 등반했는데, 산구비가 험하고 비탈길도 거칠어서 성벽을 끼고 오르는 산행이 그리 만만치 않았다. 동문에서 북문 구간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음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드물어서인지 성벽 구조물들은 부서지고 떨어진 채로 방치되고 있었다...
남한산성 작년에 유네스코 기념 세계문화재로 등록된 남한산성. 1636년 병자호란의 치욕이 깃든 산성이다. 1597년 왜란이 끝난 후 그 교훈을 새기지도 못한 채, 40년 후 만주족의 침략에 변변히 대응도 하지 못하고 이 남한산성에 숨어 항거하다가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그 후 274년 후인 1910년에 왜적에게 나라를 송두리째 뺏기고 식민지로 36년을 보내게 되었다. 지금의 국내 정치판도 왜란 당시나 호란, 한일합병 당대보다 좋을 것은 하나도 없을 성싶다. 정치판에서 그들만의 이전투구에서 민심은 안중에 없고 눈앞의 부정한 재물에만 탐욕스러우니, 정부의 꼬라지가 볼성사납기 그지없다. 윗물부터 맑아야 한다는 옛말도 그저 옛말로만 전하나 싶다. 어디부터 잘못되었을까. 아마도 우리 한국인의 유전자에 정의는 없고 현실의 ..
남한산성 날씨조차 을씨년스러웠다. 오랜만에 들렸던 남한산성. 남문을 통과하려니 했더니, 그 사이 남문 아랫녘에 터널을 뚫어 정문 격인 남문은 보지도 못했다. 구름이 가득한 저물 무렵에다 바람이 강하게 불어 가볍게 입은 옷차림이 부담이 되어 자동차 밖으로는 얼마 나가지도 못했다. 휴일을 맞아 사람들도 많아 주차할 곳도 마땅치 않았고... 산성 안에 복원해 놓은 행궁도, 지휘소인 수어장대도 가지 못하고, 로터리 부근의 식당에서 저녁만 먹고선 흩뿌리는 비를 맞으며 되돌아왔다. 치욕의 한이 서린 이곳 남한산성. 그저 과거의 일로 치부하고 말 것인가. 임진왜란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맞은 두 번의 호란에 조선군은 제대로 대응도 못하고 삼천리강산을 오랑캐들에게 내주고 말았다. 임란 이후 44년 만인 병자호란에 인조임금은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