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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르네상스의 꽃 피렌체

 

  피렌체 미켈란젤로 언덕에 다시 섰다. 10여 년 전, 겨울에 이 자리에 서서 얼마나 감격했었던가. 르네상스 발상지인 이곳에서 미켈란제로나 다빈치의 유적들을 볼 수 있다는 것에 무한 감격했었다. 가이드를 따라다니며 보는 유적들이 세계 문화사에 이바지한 바 얼마나 컸었던가를 생각하며 감동했었다. 교과서에서만 보았던 단테 이야기를 그의 생가 앞에서 들을 수 있다는 것에 또한 감동했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이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피렌체 시가의 그윽한 풍경은 예와 다름이 없었다.

 

  본디 다비드 상은 시뇨리아 광장 베키오 궁 앞에 세웠다고 한다. 당시 피렌체는 공화정을 수립하였고 미켈란젤로 역시 정치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이때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가 공화정 서기관장이어서, 다비드 상은 바로 공화정의 대표적인 상징이었다. 이후 광장에 있던 다비드상은 발등을 망치로 맞기도 하고, 벼락도 맞는 등 많은 수난을 당하자 지금의 장소인 아카데미아 미술관 안으로 옮겼다. 원래 있던 자리엔 모조품을 세우고, 피렌체 언덕 성벽이 있던 곳에 미켈란젤로를 기념하여 다비드상을 본뜬 조각을 세워 미켈란젤로 언덕으로 불리게 되었다. 

 

  미켈란젤로 언덕에 다시 서서 피렌체 시가를 굽어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다만 전에 보았던 겨울 풍경대신에 녹음이 짙게 어우러진 아르노 강 건너 성당의 종탑들과 붉은색 돔, 고건축들의 지붕들이 여름 햇살 아래 고색창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인구 20여만의 저 작은 도시 속에서 미켈란젤로나 다빈치 등 수많은 예술가들이 자본가들의 후원을 받아 문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 

 

  미켈란제로 언덕의 다비드 상

 

  아르노 강과 피렌체 시가지 전경

 

  피렌체 아르노 강

 

  옛날엔 이 강을 경계로 두 나라가 대치하고 있었는데, 강을 사이에 두고 서있는 두 탑은, 과거 국경을 경계하던 망루였다고 전한다.

 

  산타 크로체(성스러운 십자가) 성당과 광장. 성당 안에 미켈란젤로와 갈릴레오, 마키아벨리, 로시니 등의 묘가 있고, 단테의 가묘(假墓)도 있다. 단테는 노후에 추방을 당해 라벤나에서 객사하여 그곳에 묻혔다. 그래서 성당 앞 오른쪽에 단테의 석상(石像)을 세워 그를 기리고 있다.

 

  사방에 네 마리 사자가 호위하고 있는 가운데 단테의 입상이 광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테 생가를 알리는 걸개와 단테 흉상.  단테는 명실상부한 이탈리아 최고의 시인(il sommo poeta)이자 14세기 르네상스의 문화사적 지평을 연 인물이다. 필생의 역작 《신곡》으로 중세의 암흑을 단숨에 걷어냈던 작가, 단테. 초라한 추방자의 모습으로 고난의 비아 트레첸토를 묵묵히 걸어갔던 피렌체의 망명자, 단테. 그의 삶은 거친 유랑으로 점철되었고, 그토록 사랑했던 ‘모든 도시의 모범’이었던 피렌체는 끝내 그를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작가의 고난은 독자의 감동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단테의 뼈저린 시련과 한에 사무쳤던 유랑은 위대한 문학과 정신을 낳았으니, 그 책이 바로 《신곡》이다. 그가 바로 이 책을 통해 중세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 새로운 인문주의 운동과 르네상스 시대의 서곡을 알리는 장엄한 시편을 쓴다. 14세기 피렌체 르네상스의 첫 정신은 단테의 삶과 문학으로 표현되었다. 그는 새로운 시대와 생각을 시작한 사람이다.

  피렌체에 남아 있는 단테의 흔적을 찾으려면 먼저 그의 전신 조각상이 말없이 서 있는 도심 동쪽의 산타 크로체 광장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다. 관람객을 응시하는 단테의 시선이 날카롭기 그지없다. 조각상은 원래 산타 크로체 광장을 마주 보고 있는 동명의 성당 입구 정중앙에 세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성당 오른쪽 입구를 지키고 있다. 피렌체의 유서 깊은 산타 크로체 성당 안에는 단테의 무덤도 모셔져 있지만, 사실 그 안은 비어 있다. 단테의 진짜 유해는 긴 유배의 마지막 정착지였던 라벤나의 산 피에르 마조레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출처 다음 백과>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36XX51400003

 

  단테 생가와 박물관 --> 우측

 

 단테의 부인 젬마 도타니가 살았다는 집과 거리. 이웃에 단테가 죽을 때까지 잊지못하고 사랑했었다는 베아트리체의 집이 있다. 베아트리체는 단테가 9세 때 첫눈에 반해 죽을 때까지 사모한 여인이다. 단테는 40년에 걸쳐 완성한 〈신곡〉에서 베아트리체를 찬미했다. 베아트리체는 피렌체 귀족의 딸인 베아트리체 포르티나리라이다. 베아트리체는 시모네 데 바르디와 결혼했으나 1290년 24세의 나이로 죽었다.

  단테는 서정시를 덧붙인 산문 〈새로운 인생〉에서 베아트리체와 자신의 관계에 대한 연대기를 쓴 뒤 〈신곡〉에서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베아트리체는 이 작품의 〈지옥편〉에서 그의 중재자가 되고, 〈연옥편〉을 통해서는 그가 닿고자 하는 목표가 되며, 〈천국편〉에서는 그를 이끌어주는 안내자로 등장한다.  정신적으로 승화한 이러한 사랑의 표현은 단테가 완전히 영적인 존재에 몰입하는 것으로 끝난다. - 다음 백과 발췌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꽃의 성모 마리아'란 뜻으로 피렌체 두오모 성당이다. 피렌체의 자본가와 상인들의 후원으로 피렌체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지은 성당으로 1296년 시작하여 1462년에 완공했다. 

 

  성당을 설계자 아르놀포 디 깜비오 상이 성당 옆 건물의 벽면에 조각으로 남아 성당을 지켜보고 있다. 

 

컴파스를 들고 두우모 돔을 올려다보고 있는 건축가 필립보 브르넬리스키 상

 

  두우모 성당 앞에 있는 8 각형의 산 죠반니 세례당(Battistero di San Giovann)  산죠반니는 피렌체의 수호성인.

 

  구약성서 창세기의 내용을 바탕으로 로렌쵸 기베르티가 40연 동안 만들었다는 문, 미켈란 젤로가 천국의 문이라 극찬했다고 전한다.

 

 시뇨리아 광장의 베키오 궁전, 1332년 완공된 것으로 현재 시청으로 사용하고 있다. 입구에는 피렌체 공화국의 문장을 지닌 사자상이 놓여 있다. 건물 중앙에 있는 탑은 높이 94m로 1298년 착공한 후 16세기에 들어서 완성되었다.  시뇨리아 광장은 메디치 가문이 살고 있던 베키오 궁전과 함께 융성했다. 시뇨리아 광장은 피렌체의 중심으로 13, 14세기 단테, 지오토, 페트라르카 그리고 보카치오 등이 활동했다.  이후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이 지속적으로 지배하며 예술가들을 후원했는데,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이 그 중심인물이었다.

 

베키오 궁과 로지아 데이 란치(Loggia dei Lanzi)

 

  예술 작품들의 복제품을 전시하는 야외 미술관 로지아 데이 란치(Loggia dei Lanzi)

 

베키오 궁전 앞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복제품

 

다비드 상 옆에 있는 바초 반디넬리의 헤라클레스와 카코스(Hercules and Cacu)상

 

 지암 볼로냐(Giambologna)의 ‘사비네 여자들의 겁탈’  여인을 안고 끌고 가려는 젊은 병사와 끌려가며 야릇한 표정을 짓는 젊은 아낙과  발밑에 깔려 끌려가는 며느리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늙은 시부의 표정과 동작이 역동적이다.

 

 첼리니(Benvenuto Cellini)의 페르세우스 상. 베어낸 메두사(Medusa)의 머리를 왼손에 높이 쳐들고 있다.

 

 코시모 1세( Cosimo I de' Medici, 1519.6.12.~1574.4.21)의 동상. 토스카나 지역을 통치하며, 뛰어난 정치적 수완으로 메디치 가문을 피렌체 최고의 가문으로 만든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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