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

예산 추사고택

  작년에 이어 두 번째 방문한 추사고택이었다. 찬 바람에 으스스하게 몸이 움츠려드는 겨울철이라서인지 고택 주변은 쓸쓸하고 황량했다. 이파리 다 떨어진 앙상한 나목들과 추사가 좋아했다는 고택의 뜨락 수선화도 흔적마저 찾을 수 없어서, 적막감까지 감돌았다.  방문객들도 없어 추사고택을 나 홀로 온전히 감상했다. 사랑채 마루 위 벽에 고택의 옛 사진이 있어 흥미로웠다. 나름대로 과거의 모습을 짐작하며 현재와 비교할 수 있었다. 예전엔 사랑채 앞까지 마당 없이 밭을 일구었다. 문화재 가치를 모르던 시절, 무심하게 무너져가던 유적들이, 오늘날 온전한 형태로 복구되어 볼 수 있는 것이 다행한 일이다.  다만 고증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작위적 창조물은 삼갈 일이겠다.

 

  우리나라 사람치고 조선시대 명필로 석봉과 추사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석봉체나 추사체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무지한 내가 알기로는 한석봉은 반듯한 글씨체로 명성을 떨쳤고, 추사는 추상화같은 상형글씨로 한 세상을 풍미하지 않았나 싶다. 추사는 뛰어난 금석문학자로 북한산 순수비 같은 옛날 비석들의 정체를 밝혀냈다는 이야기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앞 글에서 언급한대로 추사의 증조부는 영조대왕의 딸인 화순옹주의 사위였다. 추사는 명문거족의 후손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주변으로부터 주목을 받았단다. 실학파인 박제가에게 학문을 배우고 24세에 생원이 되고, 이후 동지부사로 가는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 연경에 가서 당대 유명한 학자들을 만나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때 노령의 학자 옹방강을 만났는데, 그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귀국 후, 서른한 살 때에는 북한산에 올라 민간에서 무학대사비로 알려진 비문을 판독해 냈다. 그리고 이 비가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임을 명확하게 고증했다. 이로 인해 그는 금석학의 대가로 명성을 얻었다. 그 후 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어 순탄하게 벼슬살이를 하여, 50에 들어 대사성, 병조참판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가문은 안동김 씨와 풍양조 씨의 권력다툼에 몰락하기 시작하여, 54세 때 아버지가 사약을 받아 사망하였고, 추사는 제주도 대정현으로 유배되기에 이르렀다. 제주도에서 9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본가의 부인을 잃는 슬픔을 겪기도 하였으며, 회한 서린 시름들을 글씨와 그림으로 달래었다. 세한도(歲寒圖)도 이때 이루어졌다. 〈세한도〉는 친구 이상적(李尙迪)이 중국에 가져가 그곳 명가들의 절찬을 받기도 했다.

 

  9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으나, 집에서 3년도 채 지내기 전에 북쪽 땅 북청으로 유배를 떠났다. 이곳에서 쓴 그의 글씨는 지난날보다 날카로운 맛은 덜 했지만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그곳 사람들이 돌화살을 여기저기서 주워왔다. 그는 온갖 풍상에 씻겨온 돌화살을 두고 〈석노가(石歌)〉를 지었다. 제주도의 수선화와 북청의 돌화살, 이것은 분명 김정희 자신을 표상한 것이다. 여기서 그는 2년 만에 풀려나 서울로 돌아왔다. 그의 나이 예순 여덟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지어 놓은 과천 여막으로 들어갔다. 관악산 아래 여막에서 조용히 일생을 돌아보며 불경을 읽기도 하고 참선에 몰입하기도 했다. 그의 여막이 바로 정토였고, 자신이 바로 부처였다. 

 

  일흔한 살에 그는 봉은사로 갔다. 그는 봉은사 언덕바지에 나무막을 얽었다. 그리고 구계(具戒)를 받고 승복을 입었다. 선비가 중이 되다니, 당시의 통념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지만 아무도 그의 행동을 비난하지 않았다. 그의 슬픔의 극치일까 아니면 염세의 막다른 골목일까. 아니다. 불염진(不染塵), 곧 부처 앞에서 무릎을 꿇고 피어오르는 향내를 맡으며 심안(心眼)이 열리는 열반의 경지일 것이다. 불로 지져도 바늘로 찔러도 미동도 않는 노융(老融, 그의 또 다른 호) 선생의 종장(終章)이었다. - <다음백과>에서 발췌하여 줄임

 

  추사고택 대문

 

  사랑채

 

  안채

 

  안채 위의 추사사당

 

 

안채 뒤 후원과 추사사당

 

  대문 안쪽면

 

  추사고택 남쪽에 자리한 그의 유택

 

  기념관 앞 추사동상

 

 

  기념관 안에 전시된 추사 초상화

 

  추사고택 옛사진

 

 추사는 모화사상에 취하여 고루한 특권의식으로, 중국 문인화풍을 본받으려 했다. 소동파를 석가님과 동격으로 생각하며 연모하고, 스승으로 삼은 청나라 옹방강을 흠모하여 조선의 옹방강이 되고자 했다.  옹방강의 호가 '봉래'였는데,  조선의 옹방강이 되고자 했던 추사는 자신을 '소봉래'라 했다. 추사의 세계관은 중국 북송의 미불, 원말의 황공망과 예찬, 청나라 석도 등의 화풍과 남종문인화의 정신이 바탕이었다.  추사, 그는 지독한 모화주의자였다.

 

화순옹주 홍문 : https://fallsfog.tistory.com/706

오석산 화암사 : https://fallsfog.tistory.com/708?category=491974

추사고택 : https://fallsfog.tistory.com/660

'국내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성시 우정면 매향리  (3) 2020.02.29
예산 오석산 화암사  (5) 2020.01.17
예산 화순옹주 홍문  (2) 2020.01.15
대관령 하늘목장  (2) 2019.10.15
용평 발왕산 관광 케이블카  (2) 2019.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