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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진천 배티 성지

  청룡사 보수 공사 때문에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청룡사 북쪽 서운산 너머에 있는 석남사로 방향을 돌렸다. 서운산을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청룡마을에서 고개를 넘어 충북 진천으로 들어갔다가 왼쪽으로 돌아 서운산 고개를 넘었다. 그 고개가 바로 배티인데, 고개 넘기 바로 전 충북 진천 땅에 배티성지가 있다. 예전에 들려본 곳이긴 했지만, 잠깐 내려 성지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곳은 1981년 신유박해 이후,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들어 교우촌을 이루자, 이곳에 신학교를 짓고, 이곳을 중심으로 신부들이 사목활동을 하였다.  김대건과 함께 마카오에 유학하여 신부 수업을 받았던 최양업이 김대건 신부 순교 후, 1849년 중국 상해에서 신부 서품을 받고 조선의 두 번째 신부로 귀국하여, 1850년부터 이곳 배티를 근거지로 충청 전라 경상도 등 삼남지방의 공소 127개소를 걸어 다니면서 11년 6개월을 사목 활동에 힘썼다. 1861년 과로에 장티푸스가 겹쳐 경북 문경에서 선종하여, 충북 제천의 봉양읍에 묻혔는데,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이를 기려 그곳을 베론성지로 조성하였다.   

 

  배티 성지는 최초의 천주교 신학교가 있었던 곳으로 조선의 두 번째 신부였던 최양업 신부가 이곳을 근거지로 사목 활동을 하였으며, 이곳에서 천주교 신자 34명이 순교하였다. 

 

  배티는 배나무 고개라는 뜻이다. 충북 진천에서 경기도 안성으로 넘어가는 고개 주변 동네 어귀에 돌배나무가 많은 배나무 고개라서 이치(梨峙)’라고 불렸다. 순 우리말로는 배티라고 부른다. 배티 일대로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들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였다. 계속되는 박해로 골이 깊은 이 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점차 늘어났다. 이곳은 진천과 안성 등다른 지역과 쉽게 연결되면서도 깊은 산골이라는 지리적 특성때문에 1830년부터 본격적으로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프랑스인 성 모방 나 베드로 신부는 1837년 5월 성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와 함께 배티마을에서 주민들에게 성체성사를 하였고, 배티 교우촌은 충청도 최초로 공소가 되었다.

 

  이후 기해박해(1839년)와 병오박해(1846년)을 거처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교우촌 수는 더욱 늘어나 현재까지 확인된 기록에 나타난 교우촌만 은골,삼박골,정삼이골,용진골,절골,지구머리,동골,발래기,퉁점,새울,지장골,원동,굴티,방축골 등 배티를 포함해 모두 15곳에 이른다.

 

  성 다블뤼 안 안토니오 주교는 신부 시절이었던 1850년 대목구장 페레올 고 요한 주교로부터 조선대목구 소신학교 설립 지시에 따라 배티 교우촌 안에 신학교를 지었다. 신학교라야 방 2 칸 짜리 초가집이었지만...다블뤼 교장 신부는 1853년 여름까지 배티에 상주하다가 다시 교우촌 순방에 나섰고, 그 뒤를 이어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배티 신학교를 맡게 되었다.

 

최양업 신부는 신학생들을 지도하며 1854년 3월 신학생 3명(임 빈첸시오, 김 사도 요한, 이 바울리노)을 말레이시아의 페낭 신학교로 유학 보냈다. 이후 배티 신학교는 문을 닫고 제천 배론 성지에 새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신학교였던 초가집 성당 겸 사제관에서  최양업 신부,프티니콜라 박 미카엘 신부 페롱 권 스타니슬라오 신부 등이 거쳐하며 사목활동을 했다.

 

 한국 천주교의 첫 번째 신학생이면서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1821년 3월 1일~1861년 6월 15일)는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복자 이성례 마리아의 장남으로 충청도 홍성에서 태어났다. 15살이었던 1836년 김대건과 함께 중국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 1849년 4월 15일 중국 상하이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중국 요동 성당에서 7개월 사목 활동 후 귀국하였다.

 

 그는 1853년 여름 조선대목구 신학교 지도를 맡은 이후 3년 동안 배티 교우촌을 사목 중심지요 본당으로 삼아 전국을 다니며 사목 활동을 해 왔다. 사목 순방이 끝나는 9~10월에는 배티 사제관에 거쳐하면서 저술에 몰두하여 글을 잘 알지 못하는 교우들을 위해 어려 편의<천주가사>를 짓고, 최초의 한글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天主歌辭)’와 성교공과(聖敎功課)를 번역한 한글 교리서‘성교요리문답’을 지었다. 

 

1861년 6월 15일 만 40세의 나이로 경북 문경에서 장티푸스로 선종하기까지 11년 6개월 동안 조선의 복음화에 일생을 바쳤다. 김대건 신부를 포함하여 박해로 순교한 103인은 교황청으로부터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나, 최양업 신부에 대한 시복시성 심사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순교자는 순교하기 이전에 받았던 박해가 기적으로 인정되어 기적 심사가 상당히 면제되는데 비해, 증거자인 최양업 신부는 기적 심사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배티와 인근에는 복자 오반지 바오로의 묘소를 비롯하여 ‘6인 묘와 ‘14인 묘 등 유명ㆍ무명 순교자 묘소가 산재해 있으며, 박해 시기 동안 배티 일대에서 체포된 순교자 수는 34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놋점 출신 오반지 바오로와 배티 출신 장 토마스, 절골 출신 박경진 프란치스코 등 8 명과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 이성례(마리아)는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때, 복자품에 올랐다

 

1999년 최양업 신부가 머물렀던 성당 및 사제관 터를 확인한 후 그 부근에 있던 농가를 매입해 철거하고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복원한 후 최양업 신부 동상도 세웠다.

 

https://namu.wiki/w/%EB%B0%B0%ED%8B%B0%EC%84%B1%EC%A7%80 에서 발췌하고 첨삭함 

 

https://fallsfog.tistory.com/47 ->배티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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