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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내린 수원 화성 한 둘레 어제 오후부터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밤사이 기온이 급강하하여 얼어붙은 눈 때문에 교통대란이 예상됐는데, 아침에 창밖을 보니 자동차들이 제법 속도를 내며 달리고 있었다. 햇빛이 쨍하여 하늘도 푸르렀고, 나뭇가지에 붙은 눈도 추위 탓으로 아직 붙어 있었다. 모처럼 쌓인 눈 풍경을 보려고 카메라를 챙겨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으로 갔다. 큰길은 제설작업으로 눈이 없었지만 이면도로는 얼어붙어 미끄러웠다. 창룡문에서 출발해서 화성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눈 내리는 풍경이라면 더 좋았겠지만 쌓인 눈을 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었다. 성 밖으로 나가 눈 쌓인 성벽 아래를 걸었다. 부지런한 사람들 덕에 이미 대부분 성곽 아래로 길이 나 있었다. 간혹 눈에 빠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등산화를 신은 덕에 어렵지 않게 지나갈..
공주 우금티 동학 혁명군 전적지 우금티 전적지 두 번째 방문이다. 날씨는 추웠지만 하늘이 맑아서 걷기에 좋았다. 주차장에 차를 두고 알림터 위 안내문부터 읽으며 우금티로 향했다. 계단 위 고갯마루 옆에 있는 위령탑은 옮겨 새로 건립해야 한다. 이 고개 너머에서 전투가 벌어진 곳을 왜 고개 넘어 동학군이 넘으려던 우금티 안 쪽 관군과 일본군이 주둔하던 우금티 안쪽 공주 쪽에 세웠는지 이해되지 않고, 동학을 빌미로 권력에 아부하며 자신만의 영화를 추구하던 부나비 같은 인물들이 동학혁명군의 원령들을 위로한다며 위령비를 세웠다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이다. 이 고개를 넘어 충청감영을 접수하고 한양으로 진격하려던 동학군은 고개 너머에서 일본군과 관군에게 전멸되고 말았다. 1894년 음력 10월 23일부터 11월 15일간의 전투는 신식 화기로 무장한..
공주 고마나루 모처럼 날씨가 화창하다. 며칠 만에 보는 푸른 하늘이다. 그런데,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졌다. 누구는 서울이 모스크바보다 더 춥단다. 중무장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고마나루터를 가보기로 했다. 초행길이라 내비게이션에 의지하는데, 고마나루 관광지 주차장으로 안내를 했다. 주차장 가운데 세운 웅장한 웅비의 탑을 보고 주변을 돌아봤으나, 어린이 워터파크 시설뿐이었다. 주변에 공주 한옥 마을과 박물관이 있고... 하는 수 없이 지도 검색을 했다. 주차장에서 길을 건너 800m 정도에 곰사당이 있었다. 도로를 건너 잡풀이 우거지고 인적도 없는 숲 속에서 사람의 흔적을 찾아 숲길 흔적을 찾아 앞으로 나갔다. 드디어 숲길을 찾았다, 핸드폰을 보며 곰사당으로 걸었다. 소나무가 가득한 숲길 주변에 곰 조각들이 보였다. ..
계룡산 자연성릉 길, 삼불봉에서 연천봉까지 지난 계룡산 산행 때, 관음봉에서 문필봉과 연천봉을 바라보기만 하고 하산한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맑은 날을 골라 사람이 적은 평일에 삼불봉에서 연천봉까지 가기로 했다. 아침에 일어나 하늘을 보니 구름 한 점 없었다. 차를 달려 동학사 주차장에 9시 30분경 도착했다. 하늘에 옅은 구름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날씨가 청명해야 가시거리가 좋아 산정에서 호연지기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늦가을 평일이라 사람들이 눈에 별로 띄지 않았다. 조용히 호젓한 산길을 걸을 수 있어서 좋았다. 한 번 갔었던 곳이고 곳곳에 안내판이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다만 돌길과 급경사 구간이 많아 무릎 압박이 힘들었다. 천정 지구 등반로 입구, 옛날 국립공원 들어갈 때 매표하고 검사하던 시설 같은데, 그대로 남아 있..
국립 대전 현충원의 가을 대전 현충원 현충지 현충지 앞, 현충문 들어가는 홍살문 현충문 - 안중근 의사의 글에서 집자하여 현판을 달았다. 현충탑 독립 유공자 묘역 작년, 카자흐스탄에서 이곳으로 이장한 홍범도 장군의 묘 현충탑 뒤 현충원의 배산인 갑하산과 신선봉 철도 유공자를 위한 기념관인 미카 129호 증기 기관차와 객차. 이봉창 의사가 철도원이었다는 건 처음 알았다. 용산역에서 역무원과 운전수습생 등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 도일하여 일본인처럼 살고자 했으나 일인들의 한인 차별에 분노하여 상하이로 건너가 김구 선생을 만나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는 도쿄 교외에서 열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히로히토 일왕을 겨냥하여 도쿄 경시청 부근에서 수류탄 1개를 던졌다. 그러나 이봉창 의사는 마차 여러 대 중에서..
계백 장군의 오천 결사대, 최후의 보루 황산성 "백제의 옛터전에 계백의 정기 맑고 관창의 어린 넋이 지하에 혼연하니 웅장한 황산벌에... " 옛 시절 논산 훈련소에서 황산 각개전투 교장으로 훈련받으러 이동하면서 불렀던 군가들이 떠오른다. 그때 각개전투 훈련장에서 '황산전투가 벌어진 황산벌은 어디일까'했던 궁금증이 항상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얼마 전 탑정호 부근에 있는 백제군사박물관과 계백장군의 묘를 보았을 때도 백제군이 진을 치고 마지막 결전을 벌였다는 황산벌에 대한 궁금함은 풀리지 않았다. 백제군사박물관에 세워진 황산루도 구색을 맞추기 위해 세운 하나의 장식물에 불과했다. 그래서 찾아본 곳이 황산성이었다. 몇몇 블로거 분들이 황산성 탐방 사진들을 포스팅해서, 그들을 참고로 했다. 내비게이션에 연산향교를 입력하고, 향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핸드폰..
연산 돈암서원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에도 불구하고 오전 한 때 날씨가 화창했다. 안동 도산서원이나 영주 소수서원은 몇 번 방문한 적이 있었으나 연산의 돈암서원은 처음이었다.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돈암서원을 포함한 한국의 서원 9곳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했다. 돈암서원은 1634년(인조 12)에 창건했는데, 조선 중기 대표적 유학자 사계 김장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기호학파의 대표적 서원이다. 서원은 예학의 종장인 사계 김장생 사후에 그의 제자들과 유림들이 창건하였으며, 조선 중기 이후 우리나라 예학의 산실이 되었다. 현종 원년(1660)에 사액을 받았으며, 고종 8년(1871)에 흥선대원군이 전국 650여 개에 서원철폐령을 내려 47개만 남겼을 때도 명맥을 유지하였다. 돈암서원은 고정산 줄기를..
계룡산 삼불봉에서 관음봉 능선 산행 오랜만에 계룡산에 올랐다. 20대 때 겨울 비오는 날, 홀로 배낭 하나 매고 갑사에서 남매탑을 지나 동학사로 넘은 적이 있었다. 인적 끊긴 오후였는데 낙엽에 떨어지는 가랑비 소리가 산골짜기에 울려 산속이 빗소리로 가득했다. 그토록 장대하게 울리던 가랑빗소리를 처음 들으며 홀로 타박타박 산을 넘었던 삼박사일의 여행은 쓸쓸하고 고독했다. 그런 연유로 그 후부터 혼자 하는 여행은 일체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카메라를 접하다 보니 혼자 하는 여행의 묘미를 쏠쏠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카메라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렵긴 하나, 아직 핸드폰 사진과 비교할 수 없는 해상력 때문에 여행의 최고의 동반자이다. 동학사 소형주차장에 차를 두고 동학사 상가 입구에서 우회전해서 천정 탐방로 방면으로 접어들..
설악산 천불동 계곡 모처럼 산악회 따라 설악산을 올랐다. 천왕봉을 오르는 최단거리인 오색에서 천불동을 통과하여 설악동 소공원까지 가는 코스였다. 오색 입구에는 단풍이 한창이었다. 열 시경 버스에서 내려 등반길에 올랐다. 일행들의 첫걸음이 모두 경쾌하다. 단풍 골짜기 물소리를 들으면서, 계곡 옆구리에 걸어 놓은 등산로를 따라 단풍 숲으로 들어갔다. 단풍잎이 빨갛게 가을을 불태운다. 나무들의 일 년 삶의 마지막 열정이다. 고도가 높아지자 단풍잎이 성글어졌다. 서리라도 맞았는지 길 위에 단풍잎이 수북하게 쌓였다. 멀리 산 능선이 보였다. 정상에라도 오른 듯 가슴이 벅차오른다. 하지만 심장의 박동은 가파르게 뛰어올랐다. 이른바 깔딱 고개, 가파른 계단이 정말로 길다. 함께 오르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진 지 오래다. 나 홀로 스틱에 ..
수원 광교산 시루봉 악몽 같던 며칠간의 블로그 불통이 이제야 정상화되니, 마치 잃었던 자식을 다시 찾은 느낌이다. 그동안 일기처럼 기록했던 일상의 자료들이 한순간에 날아간 것 같아, 멘붕 상태여서 상실감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었다. 파란 시절부터 시작한 것이 파란이 없어지고, 네이버로 갔다가 파란에서 티스토리로 자동 연계해 준다고 해서 이곳에서 이어 포스팅한 것인데, 여기에선 스킨을 강제로 바꾸거나 편집기를 없애는 등, 일방적 폭거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도, 꾸욱 참고 견뎌왔었는데 이지경이 되어 버렸다. 인터넷 사이트 제작할 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마는 이곳에선 사용자들의 실력이 대단한 줄로 알고 있나 보다. 모든 걸 쉽게 이용자 수준에서 생각했으면 좋겠다. 본사의 수익을 위해 광고를 붙이도록 권장하는 모양새인데, 그..
그 때 그 사람, 궁정동 안가 나동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에서 만찬중 살해되었다. 사건 발생 후 신군부는 그 역사적 현장인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안전가옥) ‘나동’을 헐어버렸다. 2층 양옥으로 잘 지어진 이 건물은 워낙 비밀스런 존재였기 때문에 사진조차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청와대 영빈관 옆에 있는 궁정동 안가는 모두 철거되고 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그나마 유일하게 남은 것이 바로 앞 청와대 경호실장 관저이다. 1993년 2월 25일 문민정부가 출범하자 청와대는 안가를 모두 헐어내고 공원(무궁화동산)으로 만들었다. 비록 10·26의 현장은 이미 지웠지만, 나머지 안가마저 기억하기 싫었기 때문이리라. 공원 앞 표석에는 “안가(안전가옥)를 헐어내고 조성한 것”이라는 설명만 돼 있다. 안전가옥이 무엇이며, 이 안가에서..
성곽길 따라 걷는 북악산 한양도성 수년 전 윤동주 문학관을 방문했을 때, 창의문에 올랐었다. 창의문에서 숙정문까지 옛 한양 성곽길을 따라 오르려 했으나 오후 3시가 넘어 입산을 통제하는 탓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청와대 개방으로 창의문 성곽길도 자유로울 것으로 생각하며 인생의 숙제 풀듯 등산길에 나섰다. 오전에 집을 나설 땐 푸른 하늘이었는데 창의문에 도착했을 땐 먹구름이 몰려들어 곧 비라도 뿌릴 정도로 음산하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행여 산 위에서 비 맞을까 걱정하며 성곽길을 따라 산행을 시작했다. 다행히 스산한 날씨 때문에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데도 땀이 나지 않았다. 경사가 급해서 무릎이 고통스러웠지만, 그동안 서슬퍼런 청와대 경비에 억눌렸던 마음이 얽힌 실타래 풀리듯 즐거운 마음으로 산에 올랐다. 창의문(자하문), 인조 반정 때..
왕의 어머니가 된 일곱 후궁의 신주를 모신 칠궁 청와대 백악정에서 서쪽 가파른 비탈길로 칠궁으로 내려왔다. 칠궁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들어온 터였다. 칠궁은 왕의 어머니가 된 일곱 후궁의 신주를 모신 왕실 사당이다. 숙종과 숙빈 최씨의 아들인 연잉군은 왕위에 오르자 1725년 어머니를 위해 사당을 지었는데, 처음에는 ‘숙빈묘’, 이후에 상서로움을 기른다는 의미로 ‘육상묘’로 묘호를 올렸고 1753년에 궁으로 승격시켜 ‘육상궁’이라 했다. 이후 고종과 순종 때 저경궁(인빈 김씨), 대빈궁(희빈 장씨), 연호궁(정빈 이씨), 선희궁(영빈 이씨) 경우궁(수빈 박씨)의 신주를 옮겼고, 1926년 덕안궁(순빈 엄씨)을 옮겨와서 육상궁에는 일곱 분의 신주를 모시게 되었다. 선희궁과 경우궁, 육상궁과 연호궁에는 각각 두 분의 신주를 모시고 있어서 신주는 일곱이지만..
주인 없는 청와대 나들이 길 건너 청와대 쪽 도로에서 신무문을 바라보는 것은 난생처음 있는 일이다.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하다 못해 동사무소 직원 한 명도 연줄 없는 내가 그 서슬 퍼렇던 청와대 안을 한가로이 거닌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80년대 잠시 삼청동에 적을 둔 적이 있었는데, 경복궁에서 삼청동으로 갈라지는 삼거리부터 지나다닐 때, 경찰들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째려보고 있어서 노심초사 조심조심 걸어 다녔었다. 그뿐이었던가. 쿠데타와 광주 학살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남산 서울타워 전망대에서 청와대 쪽으로 사진도 찍지 못하게 했고, 삼청동에선 집집마다 호구조사까지 시키며 자기 생명을 철저하게 보존했다. 박정희 대통 땐 북악 스카이웨이 팔각정 부근에서도 청와대 쪽으로는 눈길도 돌리지 못할 정도로 지엄하고..
초가을 경복궁, 복원된 취향교 광화문 앞 광장이 달라졌다. 세종문화회관 쪽 도로는 나무들이 울창한 숲으로 바뀌었다. 광장 왼쪽으로 나무를 심은 커다란 돌화분도 듬성듬성 놓여 있었다. 필요할 때 시위 방지용으로 쉽게 옮길 수도 있다는 말도 있어서 보기에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듬직하게 광화문을 지키고 계신 이순신 장군 동상을 지나 경복궁으로 향했다. 18년 독재자 박정희가 세운 장군의 동상은 개선의 여지가 많음에도 반세기 이상을 그 자리에 우뚝 서 오늘도 부릅뜨신 눈으로 세종로를 지키고 있다. 오른손으로 잡은 장검과 중국 장수의 갑옷, 거북선 아래 엎어 놓은 북 등, 수많은 오류가 지적되고 있음에도 무심한 세월은 호국의 신 충무공 곁을 비껴서 지나간다. 민족의 성군이신 세종대왕 상, 오늘도 어리석게 살아가는 이 땅의 위정자들..
부여 만수산 무량사 꽃지에서 귀가하는 길에 보령시 뒷산맥을 돌아 부여 외산면 만수산 무량사에 들렸다. 무량사는 남북국 시대 창건된 사찰로 임진왜란 당시 왜적이 불태워 없앤 것을 임란 후 인조 때 터를 옮겨 중창했다고 한다. 특히 무량사는 매월당 김시습 선생께서 돌아가신 곳으로 국내 유일하게 그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 재작년 겨울철에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초가을 경관은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무량사 들어가는 일주문 무량사로 건너가는 극락교, 도로 왼편엔 매월당 부도가 있고, 오른쪽에 무량사가 있다. 무량사 초입 요사채 천왕문 천왕문에서 바라보는 이층 전각의 극락전, 구부러진 소나무 덕에 극락전 전경이 막히지 않았다. 무심한 소나무에도 불심이 가득한 듯하다. 왼편의 향적당, 천막 아래 현수막에 매월당 초상이 붙어 있었다. ..
해저터널로 가는 꽃지 해변 차박 1박 2일 보령과 원산도 사이 해저터널은 2012년 4월 착공하여 2019년 6월 관통한 후, 작년 12월 1일에 개통했다. 평소 궁금했던 곳이라 추석 연휴를 이용하여, 이 터널을 통과하여 안면도 꽃지 해변에서 가족과 함께 하룻밤 차박을 하고 돌아왔다. 보령 해저터널은 총길이 6,927m로 국내 최장 해저터널이며, 도로 해저터널로는 세계에서 5번째로 길다고 한다. 이 터널은 77번 국도의 연장선으로서 최저 수심 80m에 전액 국비로 시공되어 거가 해저터널과 달리 전구간 무료였다. 터널 안에 결로 현상이 생겨 도로가 젖은 상태라고 뉴스에서 들었는데, 보도와는 달리,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 터널 안 도로 전체가 바짝 말라 차량 운행에 전혀 이상 없었다. 원산도 가는 보령 해저 터널 입구 해저터널 안 원산도에서 안면도로..
논산 탑정호 출렁다리 논산 탑정호 출렁다리는 2021년 10월에 완공을 했는데, 길이 600m 넓이 2.2m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길단다. 논산의 명물이라는 소문에 건너 보았다. 예전에 갔던 예당호 출렁다리는 높이도 높고 현수교 주탑의 높이도 대단해서 전망대에 올라가 시원한 전망을 볼 수 있었다. 아쉽게도 탑정호 출렁다리 현수교는 높지 않은 두 개의 주탑이 설치되고 가운데 받침 기둥이 있어서 비교적 안정화되어 출렁거리지도 않아 스릴감이 덜 했다. 어찌 보면, 우리나라 저수지와 산간 계곡에는 지자체마다 경쟁하듯 걸어 놓은 출렁다리로 몸살을 앓을 듯하다. 또 산과 바다에는 케이블카를 설치하여 관광자원화 한다는데, 후손에게 물려줄 귀중한 자연을 얄팍한 상술로 망가뜨리는 건 아닌지 염려스럽다. 설악산 오색 케이블카는 환경단체에서 극구..
백제군사박물관과 계백장군의 묘 논산 육군 훈련소에서 황산교장으로 다니며 훈련받던 옛시절, 황산벌의 위치를 늘 궁금하게 생각했었다. 지금도 그 정확한 위치를 모르겠다. 한 번 마음 먹고 답사를 해봐야 할 것 같다. 백제군사박물관을 방문한 것은 두 번째이다. 황산벌은 박물관 남동쪽, 탑정호 동쪽으로 추정된다. 코로나 완화책으로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예전과 달라진 것은 없었다. 박물관 안에서 유물들을 관람한 후, 계백장군의 묘소에 들려 참배하고, 인근에 있는 장군 동상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최근에 건설했다는 탑정호 출렁다리로 향했다. 백제군사박물관 전경 박물관 입구 안내 데스크 앞, 게시물 안악3호분 벽화를 재현한 미니츄어 인형 전시물, 당대의 무기류들을 볼 수 있다. 백제군의 무장 황산벌 전투 장면 무기제작 조형물 계백 장군의 일대기 ..
연산 영모재 영모재는 사계 김장생의 7대 조모 양천 허씨를 추모하는 사당이다. 양천 허씨는 고려말 명문가의 딸로 광산 김씨 문중 김문과 혼인했으나, 17세 어린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였다. 친가에서는 어려서 과부가 된 딸을 불쌍히 여겨 개가 시키려 했으나, 양천 허씨는 개가를 뿌리치고 유복자 김철산을 업고 송도에서 이곳 연산 시댁으로 걸어 내려와 수절하며 아들을 키웠다. 아들 김철산은 의정부 좌의정을 지낸 김국광(金國光), 김겸광(金謙光), 김정광(金廷光), 김경광(金景光) 등을 두어, 이들이 광산 김씨 문중을 번성케 하였다. 문중의 후손들은 할머니의 음덕을 기리며, 묘역에서 빤히 건너다 보이는 가까운 곳에 할머니를 추모하여 영모재를 지었다. 풍문으로는 조선조 인조 때 지어 그 동안 몇 차례 보수했다고 한다. 영모재를..
사계 김장생 선생 묘역과 사당 논산은 광산 김씨들의 집성촌이 많은 곳이다. 문원공 사계 김장생의 조상들은 대대로 연산에 연고를 두었다. 그런 까닭에 연산에 사계 묘역과 사당이 있다. 모처럼 명문가인 광산 김씨 사계 김장생 선생의 묘를 찾아 연산을 찾았다. 처음엔 종갓집을 들렸는데, 특이하게도 안채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다. 영업시간 이전이라 인기척이 없어 대충 안을 살펴보곤 종갓집 뒤에 있는 묘역을 찾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사계선생의 묘는 묘역 맨 위에 있었다. 사계 선생 묘 아래 양천 허씨 묘가 있었는데, 그 규모가 사계 선생의 묘보다 크고 웅장해서 놀랐다. 알고 보니 양천 허씨는 사계의 7대 조모로 17세에 임신한 상태에서 남편이 요절하자 친정 집안에서 개가를 서둘렀다. 딸은 부모의 권유를 뿌리치고 개성에서 시댁인 이곳 연산까..
5월의 마곡사 몇 번을 다녀왔지만 마곡사는 정감이 가는 사찰이다. 백범 김구 선생이 을미사변에 왕비인 민비가 일제에 시해되자, 분한 마음에 황해도에서 민간인으로 변장한 왜군을 죽임으로써 그 원수를 갚고자 했다. 그 죄로 인천 감옥에 압송되어 옥살이를 하다가 탈옥하여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에 이곳 마곡사에서 잠시 의탁한 적이 있다. 2018년 6월 30일 유네스코는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을 세계유산목록으로 등재하였다.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은 통도사(양산), 부석사(영주), 봉정사(안동), 법주사(보은), 마곡사(공주), 선암사(순천), 대흥사(해남) 등 7개 사찰이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 ‘7~9세기 창건 후 현재까지 지속성, 한국 불교 역사성’이 세계유산 등재..
오월의 꽃 집 가까운 숲 속에 들어서자 달콤한 아카시아 향이 코를 찔렀다. 꽃향기를 따라 숲 사이를 해쳐 주위를 바라보니 곳곳에 탐스럽게 핀 하얀 아카시아꽃이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달렸다. 어린 시절 국민학교 저학년 때, 할아버지 도움으로 아카시아 씨를 채취해서 학교로 가져갔던 기억이 아스라이 떠올랐다. 5월이 되면 우리나라 산을 하얗게 물들이는 아카시아꽃, 본디 번식력이 강하기도하지만 산림녹화에 급했던 1960년대 초엔 어린애들 노동력까지 동원해서 씨앗을 채취하여 전국에 뿌렸다. 그덕에 벌거숭이 붉은 산들이 몇 십년만에 푸른 산으로 바뀌었다. 오히려 요즘엔 아파트를 짓느라고 푸른 산을 파헤쳐 위험천만한 벼랑을 만들고 그옆에 주택들이 들어서는 난개발이 한창이니 격세지감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땐 학교 숙제가 파리 ..
대전 한밭식물원 날씨가 화창한 탓에 대전 갑천에 있는 한밭 식물원으로 나들이 나갔다. 식물원은 넓은 대지에 중앙 광장을 중심으로 동쪽 정원과 서쪽 정원으로 꾸며져 있었다. 식물원 남쪽에는 예술의 전당과 미술관이 있어서 대전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고즈넉하고도 다채로웠다. 공휴일 오전이라 사람들이 붐비지 않아 좋았다. 중앙 광장에서 가족용 3인승 자전거를 빌려 타고 30분여를 돌아다녔다. 정원을 다닐 수 있는 줄 알고 대여했으나, 중앙광장과 엑스포 다리에서만 탈 수 있었다. 자전거 주행 중 지갑을 분실하는 사고가 났다. 아들 뒷주머니에 넣었던 지갑이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는 바람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일단 안내소에 신고를 하고, 카드사에 연락해 카드 분실신고를 했다. 그리고 자전거 주행로를 따라 한 바퀴 돌면서 바닥을 훑..
대전 유성구 신선봉 엊그제 대전에 내려갔다가 저물 무렵 도로 옆에 있는 신선봉 등반로 안내문을 보았다. 무심코 산길을 따라 고개 하나를 넘었더니 이미 서산에 해가 지고 있었다. 어둠 속 산행은 무리라 싶어 왔던 길을 되돌아 나왔다. 대전 유성구 북쪽 지역은 유달리 군사지역이 많아 민간인 통제구역이 많다. 국립 대전 현충원 뒷산에 올라보리라 마음먹었다가 번번이 등산로가 막혀있어 오르지 못했었다. 때마침 날씨가 좋아 산책하러 나왔다가 신선봉이 떠올라 나 홀로 산행에 나섰다. 큰길에서 도보로 3km가 되지 않아 가벼운 마음으로 산에 올랐는데, 예상외로 비탈이 가팔라 오랫만의 산행이 조금 힘겨웠다. 더구나 수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더 피로감이 몰려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산길은 황토길이라 부드러웠다. 현충원 철책을 끼고 한참을 ..
영산홍의 계절, 방화수류정 바야흐로 영산홍의 계절이다. 화사했던 벚꽃들은 변덕스런 봄바람에 꽃보라 지며 눈처럼 떨어져 길모퉁이마다 수북이 쌓이고, 동네 곳곳에 빠알간 영산홍이 피어났다. 영산홍의 계절에 더욱 빛나는 곳, 화성 방화수류정으로 한 걸음에 갔다. 그런데, 방화수류정의 영산홍은 화려한 빛깔을 잃고 있었다. 방문객들이 워낙 많아 시달리고 밟혀서 용연 주위의 꽃나무들이 앓고 있었다. 동네 공원이나 아파트 뜨락의 영산홍보다도 그 화려함이 떨어진다. 시에서 적극적으로 망가지고 훼손된 개체수를 대대적으로 보완해야 할 것 같다. 화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방화수류정을 찾아오는 나그네들이 무수한데, 연못가에 듬성듬성 웅덩이가 파이고, 용연 연못에 코로나 방역 마스크가 둥둥 떠다니는 것은 관리가 그만큼 소홀하다는 것일 것이다. 동북포루에서..
담낭 제거 수술 세월을 이기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우리네 신체는 더욱이 무상하다. 금년 설날 이후부터 가끔 명치 아래가 답답하고 거북해서 식도염으로 생각하고 동네 의원에서 약을 처방받아 복용했으나, 나아지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에 수원 성빈센트 병원에 10여 일 후인 2월 25일 예약을 하고 기다렸다. 때마침 코로나 확진자들이 어찌나 폭증하는지, 행여 병원에서 감염될까 염려되어 예약을 취소했었다. 복부의 불쾌감이 괜찮은 듯싶다가도 다시 심해져서 별 수없이 빈센트 병원에 다시 3월 11일 예약을 하고 병원에 갔다. 공교롭게 오미크론 환자들이 정점에 도달하던 시점이었다. 4년 전 찍었던 CT cd를 가지고 진료 전 병원 영상 복사기에 복사한 후, 시간에 맞춰 예약 의사를 만났다. 4년 전 CT 소견에 담석이 많았다고 하..
봄동네 산책 처음 파란에서 블로그를 시작할 때가 좋았던 것 같다. 이따금 파란 우체부가 방문해주기도 해서 나름 비슷한 취향의 블로거들과 교류할 수도 있었으나, 파란이 폐쇄되어 닉네임도 쓰지못해 개명까지 하면서 티스토리로 갈아탄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처음 이곳으로 옮겨왔을 때는 사진을 크게 게재할 수 있어서 나름 만족했으나, 파란의 운영 방식과 달라 실망도 컸다. 그러던 중 금년 3월 말일에 느닷없이 운영자 멋대로 제한적인 스킨을 적용시켰다. 고작 적용할 수 있는 스킨도 달랑 몇 개뿐이어서 원망스럽다. 홈페이지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으면, 폼나게 만들어 쓰련만 겨우 사진과 글을 업로드하는 정도인 대중들에게 전문가적 수준을 요구하는 횡포가 대단하다. 편하게 사용할 수 있었던 티 에디션도 일방적으로 없애버리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