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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동네 산책 처음 파란에서 블로그를 시작할 때가 좋았던 것 같다. 이따금 파란 우체부가 방문해주기도 해서 나름 비슷한 취향의 블로거들과 교류할 수도 있었으나, 파란이 폐쇄되어 닉네임도 쓰지못해 개명까지 하면서 티스토리로 갈아탄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처음 이곳으로 옮겨왔을 때는 사진을 크게 게재할 수 있어서 나름 만족했으나, 파란의 운영 방식과 달라 실망도 컸다. 그러던 중 금년 3월 말일에 느닷없이 운영자 멋대로 제한적인 스킨을 적용시켰다. 고작 적용할 수 있는 스킨도 달랑 몇 개뿐이어서 원망스럽다. 홈페이지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으면, 폼나게 만들어 쓰련만 겨우 사진과 글을 업로드하는 정도인 대중들에게 전문가적 수준을 요구하는 횡포가 대단하다. 편하게 사용할 수 있었던 티 에디션도 일방적으로 없애버리고... ..
봄소식 주변 지인들이 하나 둘 확진되어 자가격리 중이라는 소식들을 전해 왔다. 점점 코로나 포위망이 옥죄어 들고 있다. 하루하루 세계 최고의 확진자 수를 기록한다며 언론들은 언제나 하나같이 호들갑을 떨고 있다. 미국에선 오미크론의 하위 종인 새로운 변이가 나타났단다. 이 시국에 평화로운 남의 나라 쳐들어가 민가를 폭격하여 죄 없는 시민들을 살상하는 정신병자 독재자까지 납시었다. 어제는 눈과 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안개가 끼고 날이 흐렸다. 한적한 길을 걷는 도중에 바람이 차가워 마스크 속 코끝에 콧물이 맺혔다. 문득 뒷 공원에서 노랗게 핀 산수유를 바라보곤 어김없이 봄이 찾아왔음을 느꼈다. 앞뜰 양지 녘엔 보랏빛 제비꽃들이 언 땅을 비집고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홍매화도 피기 시작하고, 명자나무도 꽃망울이..
화성시 궁평항 완연한 봄날씨였다. 하늘도 쾌청해서 봄기운에 마음이 들떠서 화성시 매향리 바다로 나갔다. 때마침 만조시간이어서 해안가에 서해 흙탕물이 넘실대며 밀려들고 있었다. 게다가 차가운 해풍이 불어와 오래 서 있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인적도 끊긴 부두 방파제 끝에서 망둥어 낚시하는 사람 서네 명이 웅크리고 앉아 차가운 해풍에도 망중한을 즐기고 있었다. 산책하러 나온 나와 즐거움의 차이가 너무 나서, 자리를 옮겨 인근 궁평항으로 이동하고 말았다. 역시 궁평항도 썰렁하긴 마찬가지였다. 인적이 드문 것이 차라리 나았다. 일일 확진자 20만이 넘는다는 코로나 바이러스 공포에 인적이 뜸한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주변 아는 사람들도 오미크론에 감염되었다는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그중 어떤 이는 보건 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
세종시 호수공원 코로나로 두문불출하다 대전에 갔다가 모처럼 바람 쐬러 원족 간 곳이 세종시 호수공원이었다. 2013년 세종 정부청사 서편 금강변에 조성한 세종시민을 위한 수변공원이다. 인공 호수 공원답게 갖가지 조형물과 쉼터들이 보는 눈을 즐겁게 했다. 겨울철 날씨가 쌀쌀한 탓에 나들이객들이 별로 없어 다행이었다. 공원 제1주차장에 차를 두고 천천히 공원 주변을 한 바퀴 걸어서 돌아 나왔다. 총 소요 걸음수가 7000보 정도로 그리 넓은 호수는 아니었다. 노무현 대통령 공약으로 만들어진 세종시, 장차 국회의사당이 이곳으로 옮겨지면 진정한 행정수도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난날, 관습헌법 운운하며, 수도 서울을 옮길 수 없다던 헌법재판소 판사의 판결이 눈앞에 오르내린다. 가진 자들이 기득권을 내려놓기가 그리 쉬운 일은..
구절초는 시들었지만 ... ... 수년 전, 구절초가 아름답다는 영평사를 보러 가다가, 영평사 입구에서 차가 막혀 방문을 포기한 적이 있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의 문턱에 선 지금, 구절초는 시들었겠지만, 옛 생각에 영평사를 찾았다. 갑자기 미세먼지가 안개처럼 자욱한 날, 집 밖을 나서는 것이 선듯 내키지 않았지만, 집콕하는 코로나 시국에 답답한 마음을 이기지 못했다. 영평사는 생각보다 작은 절이었다. 동향으로 자리 잡은 대웅전 앞에 부여 정림사지 5층 탑을 본뜬 시멘트 탑이 있었다. 향후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겠다는 염원을 시멘트 모조탑으로 대신하고 있었다. 영평사 뒷산이 이른바 장군산인데, 이 일대에 구철초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지금은 말라 시들은 꽃대의 흔적만 볼 수 있었지만, 아직까지 생명력을 보여주는 몇 송이 구절초들을 보는..
기흥 호수 둘레길 이따금 기흥호수 둘레길을 걷는다. 금년초에 서쪽 둘레길을 완공하고, 들어가는 초입에 작은 주차장까지 만들어 놓았다. 걷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아 여러 상념에 잠기며 호젓하게 걸을 수 있어서 좋다. 지난 시월에 갔을 땐 남쪽 제방으로 가는 끝자락 부근에 나무다리 공사를 하더니, 그것도 완공이 되었다. 덕분에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내리는 수고를 덜었다. 주차장에 차를 두고 제방 끝까지 걸어갔다 되돌아왔다. 빠른 걸음으로 약 8000보 정도... 가을의 끝자락에 떨어져 내리는 참나무 잎새들을 바라보며 코로나 시대에 시들어 가는 무상감을 느꼈다. 남쪽 제방 끝에서 바라보는 풍경 본디 농업용수를 쓰기 위한 저수지였으나, 논들이 사라져 버린 지금, 저수지 물든 기흥 반도체 공장의 공업용수로 사용되는 것 같다. 정면..
가을 산책 금년 가을은 유달리 짧게 지나는 것 같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낙엽들이 흩날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져 뒹굴며 날아간다. 수북하게 쌓인 낙엽길이 미끄럽다. 행여 넘어질까 조심스레 걸음을 옮긴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동네를 한 바퀴 걸으며 시간이 지나가는 소리를 바라본다. 모든 것이 어설프게 지나간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삶의 여정도 뒤죽박죽 굴러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이터에선 해맑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놀이터가 코로나 이전처럼 붐비진 않아도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노는 모습이 그저 귀엽기만 하다. 문득 외국인이 다가온다. 피부색과 상관없이 나도 모르게 긴장하며 한 발짝 떨어져 걷는다. 이런 것이 이른바 인종차별일까. 동네를 한 바퀴 돌아 집에 들어와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며 별 의미도 없는 하루..
오산 독산성 세마대 오랜만에 독산성에 올랐다. 그 사이 독산성 주변이 말끔해졌다. 동북쪽 성벽은 아직도 발굴작업이 끝나지 않아 성벽 따라 한 바퀴 도는 일주는 할 수 없었다. 내 소견으론 특별한 유물이 나올 것 같지 않은데, 공사를 이리 오래 끄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날씨는 맑았지만 연무가 끼어 멀리 바라보는 시계는 시원치 않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백제시대 창건했다는 보적사는 대대적으로 보수 중이었다. 대신 스님의 독경소리가 청량하게 가을날 햇살처럼 세마대 주변에 퍼지고 있었다. 주차장에서 독산성 서문으로 오르는 산길 독산성 서편 성벽 서문 서문 앞 남쪽 방향 서북성벽 끝 치성에서 바라보는 남쪽 방향, 성벽 안쪽으로 말뚝을 박고 줄을 연결해서 안전지대를 만들었다. 예전에 비해 깔끔해진 느낌이었다. 북쪽 성벽,..
걸어서 창룡문에서 화서문까지 일교차가 심한 나날이다. 기온이 떨어지면 비염이 극성을 부린다. 알러지가 심해 재채기가 나오고 콧물이 줄줄 흐른다. 전에는 새벽에 운동을 나갔는데 기온이 떨어진 요즘 아침엔 밖에 나갈 생각도 못한다. 오전 10시가 넘어서야 기온이 오르면 비로소 나간다. 병원 처방약도 약 먹을 때, 그때뿐이다. 약을 먹지 않으면 다시 재발되니까 봄가을과 겨울철이 고통스럽다. 나잇살 먹으면서 이목구비가 하나 둘 망가지면서 먹는 약봉지가 늘어가니, 좋아하는 여행할 날도 그리 많이 남지 않은 듯하다. 그나마 코로나 때문에 마음대로 떠나지도 못하지만... 햇살이 중천에 오르자 기온도 올랐다. 섭씨 15 도면 걷기에 딱 좋은 날씨다. 하루 만 보 이상 걷기 시작한 것이 일 년이 되었다. 덕분에 체중이 10kg 정도 빠지고 중성지방..
대전 현충원 홍범도 장군의 묘 금년 광복절에 카자흐스탄에서 78년 만에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와,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암울했던 시기 일제에 맞서 1920년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홍범도 장군은 1935년 스탈린에 의해 연해주 거주 조선인들과 함께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가 1943년 이역만리 카자흐스탄에서 운명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963년 홍장군께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였다. 중앙아시아에서 고생하다 귀국하여 대한민국에 터를 잡고 사는 고려인들처럼, 이제 홍장군의 유해도 독립된 나라 대한민국에 귀환하여 영면할 수 있게 되었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 겨울 날씨가 돼버렸다. 다행한 것은 바람이 불지 않아 햇볕이 제법 따스했다. 홍장군의 묘역을 쉽게 찾을 수 없어 현충원 직원에..
대전 보문산성 자동차 내비게이션이 일러주는 대로 보문산 아래 공영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보문산성을 향해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갔다. 구불구불한 길가에 차량들이 주차되어 있음에도 많은 차들이 꾸역꾸역 언덕길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길가에 주차된 차들 때문에 도로가 복잡하긴 했지만, 제대로 된 이정표가 없어 휴대폰으로 지도를 보며 먼저 보운대를 찾아갔다. 포장도로 큰 구비를 지나가자 축구장 만한 커다란 주차장이 있었다. 차들도 별로 없었고... 미리 찬찬하게 살피지 못한 내 불찰이 컸다. 네비를 과신한 것도 잘못이었고... 인근에 이정표가 없어 사람들에게 물어 길을 찾았다. 주차장 위에 목재문화체험장, 그 너머에 보운대가 있었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 대부분은 벌써 코로나와 함께 살기로 한 모양이었다. 마스크를 쓴 사..
하동 삼신산 쌍계사 남해도에서 돌아올 때, 하동 섬진강변 길을 택했다. 섬진강 구비가 아름답고 벚나무숲 가로수가 예쁜 까닭이었다. 수년 전 구불구불한 길을 넓히고 곧게 펴서 도로가 강변을 따라 시원스레 펼쳐졌다. 좀 더 달릴 수 있을 터인데 속도가 50km-60km/h로 제한되다 보니, 운전하는 입장에선 짜증이 난다. 곳곳의 과속감시 카메라 때문에 속도를 올릴 수 없다. 그래도 은빛으로 빛나는 강줄기를 따라, 예전에 들렸던 악양면 들판의 부부송과 최참판댁을 추억하며, 전라도와 경상도가 만나는 화개장터를 돌아 쌍계사로 들어갔다. 화개장터에서 쌍계사로 가는 도로는 왕복 2차선으로 길이 좁았다. 제한 속도는 40km/h. 안전을 위해서 그렇다니 할 수 없지만 전방에 차가 없으면 시원하게 주행하게 할 수는 없을까. 차밭이 많아 길..
남해 충렬사와 거북선 남해도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남해 나루터 근처에 있는 충무공 충렬사를 찾아갔다. 잘 지어진 안내소 근처에 차를 세우고 언덕길을 올라 충렬사에 도착했는데, 아뿔싸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충렬사는 보수 중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열린 정문의 쪽문으로 들어서니, 입구부터 공사 중이었다. 보수공사가 아니라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을 새로 짓는 것 같았다. 살며시 들여다볼 틈도 없어 하릴없이 되돌아 나오고 말았다. 그 허무함을 달래기 위해 충렬사 안내소 앞바다에 떠있는 거북선 모형을 둘러보며, 500 원을 내고 거북선 안에 들어가 내부를 둘러보았다. 겉에서 보았을 때는 그럴듯해 보였으나, 내부는 엉망이었다. 그리 두껍지 않은 송판으로 대충 짜 맞추고, 싸구려 인형에 조악한 조선 수군의 옷을 입혀 전시하고 있어..
남해 독일마을 우리나라 경제가 어려웠던 1960년대 노동 인력이 부족했던 독일에 한국 남자들과 여자들이 광부와 간호사로 취업했었다. 그 당시 광부나 간호사로 독일에 간 사람들은 노동자 출신이 아니었다. 고등학력을 이수한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독일에 취업하여 독일인들이 기피했던 노동을 대신했었다. 그들의 일부가 고국에 돌아와 2001년부터 정착한 곳이 남해 독일마을이다. 독일 각지의 주택들을 자기 취향에 맞춰 포구가 내려다 보이는 비탈에 지어 독일 분위기가 이국적 풍취를 자아낸다. 수년 전 이곳에 왔을 때 역시 안개 때문에 뿌연 그림자만 보고 갔었다. 안내소 건너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 다니면서 이국적 정서를 느껴 보았다. 모두 지중해풍으로 빨간 지붕을 한 것이 이채로웠다. 상업적 목적인 위락시설로 개발한 경기도..
남해 상주 은모래 해변 25-6년 전 여름, 가족과 함께 먼 거리를 달려 이곳에 왔다가 주차를 할 수 없어 되돌아간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어찌나 많았는지 골목까지 쑤셔 넣은 듯 수많은 차량들 때문에 어린애들 콧바람도 쐬어주지 못하고 허망하게 되돌아가고 말았다. 다행히 인근 작은 포구 해수욕장 모래사장에 텐트를 치고 하룻밤 지냈었다. 옆자리에 야영온 중학생들이 밤새도록 떠드는 수다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지만, 그래도 행복한 시간이었었다. 철 지난 해수욕장에는 인적이 끊긴 듯 한적하고 여유로웠다. 주차장도 텅 비어 있어 속 태울 일도 없었다. 해수욕장 뒷길을 한 바퀴 탐색한 후, 주차장으로 되돌아와 여유 있게 자리를 잡고 차를 세웠다. 그리고 해변으로 나가 은모래를 밟으며 남해바다의 풍미를 감상했다. 완만한 경사와 고운 모래로..
남해 금산 보리암 보리암 아래 전망은 절경으로 꼽는 명승이라는데, 이전에 두 번을 방문했지만, 안개 때문에 그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다. 관음포 충무공 유적을 참배한 후, 금산 보리암으로 이동했다. 오늘은 날씨가 너무 맑은 탓에 안개보다 더위가 걱정이었다. 가파른 금산 산마루를 구불구불 힘들게 올라 주차장 매표소에 도착했다. 한려해상 국립공원 공단에서 징수하는 주차료가 4000원으로 생각보다 과하단 느낌이었다. 주차장 매표소에서 한참을 올라가 보리암 입구 주차장에 주차한 후, 보리암 매표소에서 1인당 1000원씩 보리암 입장료를 내고 산길을 타박타박 30여분 걸어 올라갔다. 보리암 가까운 언덕 구비 전망대에서 드디어 탁 트여 막힌 곳 하나 없는 일망무제 남해를 바라볼 수 있었다. 여행의 즐거움이 바로 이런 것일 게다. 사진..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 유허지 그동안 몇 번이나 노량을 건너 남해도에 갔었지만, 충무공께서 전사하신 곳이 노량해협 쯤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관음포 앞바다가 격전지였고 전투 중 순국하신 충무공 유해가 이곳 관음포에 처음 내려졌었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다. 내 무지함을 탓하며, 새로 건설된 노량대교를 건너서 관음포 충무공 유허지에 도착했다. 공원처럼 잘 꾸며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안내소 직원에게 길을 물었다. 관음포는 포구 한가운데 서쪽으로 길게 뻗은 반도가 있는데, 그곳에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추모하는 '이락사(李落祠)'라는 유허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충무공께서 순국하신 지 234년 후, 순조 32년(1832년)에 이순신 장군의 8대손으로 이항권이 삼도 수군통제사로 부임하였다. 그는 통제사로 부임한 후 왕명을 받들어 단을 쌓아 ..
고군산군도 1박2일 차박여행 아들과 함께한 고군산군도 1박 2일 차박 여행이었다. 추석 연휴가 길었던 탓으로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그동안 벼뤘던 고군산군도 차박 여행을 결행했다. 이미 고군산군도 방문은 몇 번 있었지만, 다리가 놓인 후 장자도까지 차량으로 이동한 것은 처음이었다. 차박지 정보가 부족해서 이곳저곳 검색을 해봤지만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해서 일단 장자도 공영 주차장에 차를 대고 대장도로 건너가 전망 좋은 대장봉에 오르기로 했다. 1. 대장봉 등정 날씨가 쾌청해서 고군산군도 도서 풍경이 그림처럼 아름다웠으나, 몰려든 차량들과 난장같이 어수선한 주차장 주변 상가의 혼란스러움 때문에 예전 한적했던 어촌 마을의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햇살은 왜 그리 따가운지, 대장도의 가파른 대장봉 계단을 오르는데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수..
김대건 신부 착지처 익산 나바위 성당 논산 국도 주행 도중 우연히 길가에 있는 안내 표지판을 보고 찾아간 성당이다. 김대건 신부님의 유적지라는 이정표를 따라 성당 주차장으로 들어섰는데, 난생처음 본 한옥 성당이어서 깜짝 놀랐다. 처음 보는 이층 누각의 한옥 성당으로, 성당 좌우에 긴 회랑까지 있어서 보기에 아름다웠다. 코로나 때문에 내부를 볼 수 없는 것이 유감스러웠으나, 겉으로 드러나는 자태만으로도 큰 감동이었다. 성당 서북쪽 화산 언저리는 1845년 10월 12일 밤 8시에 조선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페뢰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11명의 조선인 신자들과 조선에 첫발을 디딘 곳이다. 이를 기념하여 베르모렐 신부가 1906년 공사를 시작하여 1907년 완공하였다.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아넬 신부가 조선인의 정서에 맞도록 한..
부여 낙화암과 고란사 궁남지의 연꽃에 미련이 남아 인근 부소산성에 올랐다. 여름 더위가 시작되어 더운 날씨였으나, 부소산 숲길은 울창한 나무 그늘길이어서 시원하고 상큼했다. 한 가지 유감스러운 것은 사자루 가는 삼거리 광장에 밴드 공연을 하는 것이었다. 아마추어 밴드에 사람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노래를 하는 것이었는데, 노래라기보다 소음에 가까웠다. 귀청을 찢는 듯한 밴드와 노랫소리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숲길을 걸어 밴드 소리가 들리지 않는 낙화암이 있는 백화정에서 산 아래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을 굽어보며, 한 때를 보냈다. 그리고 그 아래, 백마강변에 있는 고란사에 들렸다. 옛날 70년대 고란사 옆에 백마산장이 있어서 그곳에서 하룻밤을 자며, 깜깜한 밤에 하늘에서 쏟아져내리는 별무리들을 보곤 너무 아름다워 밤..
부여 궁남지 행여 연꽃은 피었을까? 작년엔 양평 세미원에서 연꽃을 봤었는데, 금년엔 어디 연꽃이 보기 좋을까 궁리하다 부여 궁남지를 떠올렸다. 궁남지 주차장을 목적지로 무작정 내달렸으나, 아직 연꽃철은 아닌가 보았다. 넓은 연밭에 듬성듬성 철 이른 연꽃들이 꽃을 피우긴 했는데, 그 꽃이 성글어서인지 탐스럽지 않았다. 하릴없이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며 잠시 망중한에 빠져 들었다. 점심 시간에 인근 식당에서 식사를 하려고 일부러 식당 밖 식탁이 있는 곳을 찾았다. 밖에서 밥을 먹겠다며 식사를 주문하자, 왠일인지 식당주인은 한사코 안된다는 것이었다. 코로나가 염려되어 밀폐된 곳이 꺼려지기 때문이라는데도 막무가내였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밖에 식탁이 있는 식당도 별로 없어서, 결국 간단한 간식거리로 점심을 대신..
철원 한탄강 고석정 이곳은 내 어렸을 때 추억이 서린 곳이다. 국민학교 때 단골 소풍장소였고, 무료할 때, 친구들과 고석정 바위 위를 오르내리곤 했다. 고석정 바위 위에 옛날 임꺽정이 숨어 지냈다는 조그만 바위굴을 다람쥐처럼 드나들던 곳이었다. 그땐, 주변의 야산은 모두 헐벗은 민둥산이었고, 고석정 위 평원은 거친 서부의 황야 같아서, 마카로니 서부영화가 유행하던 60년대 초에 만주 벌판 배경의 마적 영화 무숙자 시리즈 영화 촬영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또, 외팔이 왕우가 하늘을 날면서 칼을 휘두르며 한 시절을 풍미할 때, 고석정 아래에선 홍콩 영화를 모방한 우리나라 배우들의 칼싸움도 꽤나 많이 구경했었다. 영화나 TV 드라마 배경으로 고석정 주변이 나올 땐 마치 고향을 본 듯 반갑기도 한 곳이다. 지금은 고석정 위..
한탄강 화적연(禾積淵) 화적연은 한탄강 비둘기낭 폭포에서 북쪽 8km 정도 상류에 있다. 한탄강 구비에 우뚝 솟은 벼낟가리 모양의 화강암 바위를 화적이라 하고 그 앞의 강 굽이를 연못이라 하여 총칭 화적연이라 부른다. 강가에서 뻗어 나온 화적 바위는 포천시 영북면에 있고, 화적연을 두루 감상할 수 있는 곳은 포천시 관인면에 있다. 화적연을 보기 위해서는 바위 건너편인 포천시 관인면 화적연 캠핑장으로 가야 한다. 비둘기낭 하늘다리를 체험한 뒤, 그 상류에 있는 다리를 건너 화적연으로 이동했다. 화적연을 감상할 수 있는 캠핑장 입구 부근 도로는 차량 두 대가 교행하기 어려울 정도로 좁은 도로였다. 캠핑장 한 구석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강가로 나가 화적연 상류에서 하류까지 거닐며 두루 돌아보았다. 화적연은 겸재 정선이 금강산에 가..
포천 한탄강 지질공원과 비둘기낭 폭포 코로나 백신을 맞고 약간의 미열과 두통을 겪었다. 백신을 맞는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한 모험이다. 연일 뉴스에 보도되는 백신 사망 사고 소식에 어쩌면 내가 포함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에 주저하다가, 인명재천이라 생각하며 사생결단하고, 접종 개시 첫날 동네 병원에서 주사를 맞았다. 접종을 했어도 활보할 수 없는 현실에 집콕하다 너무나 답답해서 모처럼 한탄강으로 멀리 원족을 나갔다. 날씨가 며칠 사이 갑자기 더워져, 뜨거운 뙤약볕 아래 걷기가 힘들었다. 목적지를 비둘기낭 폭포로 정하고 갔는데, 목적지 근처에 지질공원 센터가 있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들려 이곳저곳을 관람했다. 다행히 다른 관람객이 없어 편안한 마음으로 전시물들을 둘러보았다. 한탄강(漢灘江)은 북한의 강원도 평강군에서 발원하여 하류에서 임진강..
공주 공산성 청명한 날씨 덕에 석장리에서 가까운 공주 공산성으로 이동했다. 공산성 서문인 금서루에서 북쪽 공산정 방향으로 성곽을 따라 북동쪽 -> 동쪽-> 남쪽-> 서쪽 성벽으로 한 바퀴 돌아 내려왔다. 금강변 남쪽 산세를 따라 성을 쌓아서 높고 낮은 지형에 따라 성벽길의 높낮이 굴곡이 대단했다. 특히 금강변의 북쪽 성곽길은, 높낮이가 심해서 오르내리기가 힘들었다. 동북 쪽의 지형이 높아 북동쪽에 오른 뒤, 남서쪽으로 내려오는 길은 비교적 순탄했다. 지난가을에 이곳 구석구석을 돌아본 탓으로 특별한 새로움은 없었다. 다만 날씨가 좋고 녹음이 어우러져 눈앞 풍경이 풍요로웠다. 공산성은 웅진 백제 시대 왕궁이 있던 곳이다.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강유역을 빼앗기고 수도 한성 위례가 함락된 백제는 475년에 이곳 웅진으..
공주 석장리 선사 유적지 연사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황사와 미세 먼지가 앞을 가리더니, 황사도 기력이 다했는지 모처럼 청명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봄빛이 너무 고와 연천군 전곡 선사 유적지와 함께 구석기 유적지로 유명한 석장리에 소위 원족을 나갔다. 도도한 역사처럼 흐르는 석장리 금강, 강변에 즐비한 버드나무에서 날리는 꽃가루가 푸른 하늘에 눈처럼 날렸다. 마스크 덕에 꽃가루 알러지 걱정을 덜 수 있어서 불행중 다행이란 웃픈 생각도 들었다. 1964년 연세대 박물관팀이 발굴한 이곳은 맨 밑 강바닥 지질층이 30~50 만년 전이었고, 발견된 나무숯은 방사선 연대로 5만 270년 이전 것이었으며, 비탈 쌓임층의 1호 집터에서 나온 화덕의 재는 2만 83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주로 어린이를 동반한 나들이객들이 대부분이..
용인 처인성 재작년 가을보다 주변이 깨끗하게 공원처럼 다듬어졌다. 예전엔 보수 공사로 주변이 어수선했었는데... 고려 후기 1232년(고종 19) 몽고의 침략 때 스님이었던 김윤후 장군이 처인 부곡의 주민들과 함께 이곳에서 몽골군 원수 살리타이[撒禮塔]를 사살하면서 몽고군을 물리쳤다. 이 전투는 몽골과의 전쟁에서 최대의 승전이었다. 본디 부곡 마을이란 천민들이 거주하던 부락이다. 국가로부터 멸시받고 양민들조차 따돌렸을 천민들이 승병들과 합세하여, 막강한 몽골군을 물리쳤다. 소외받던 그들의 처절한 투쟁이 눈물겹게 고마웠다. 자고로 우리나라에 외적이 침략했을 때, 관군보다도 의병들이 봉기하여 외적을 물리친 사례가 많다. 고려 무인시대 최충헌의 사노비였던 만적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며 반란을 일으켰다. 만적의 난..
대전 계족산 황톳길과 계족산성 토요일 아침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어 산행을 머뭇거리다 큰맘 먹고 길을 떠났다. 그런데, 계족산 자락 장동산림욕장에 이르자, 숲 사이로 파란 하늘이 내비치었다. 대전시에서 이곳 산림욕장에 황톳길 순환도로를 만들어 시민들의 산행을 도왔다. 등산로 옆, 황톳길을 따라 맨발로 등산하며 삼림욕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계족산성에 오르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맨발 황토체험은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아기자기한 산림욕장에서 맑은 숲과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숲 향기를 호흡하면서 산길을 걸었다. 계족산성은 보수 중이어서 서문터에서 남문까지 일부분만 일부분만 볼 수 있었다. 북쪽은 흰색 보드로 벽을 세워 막아 통행을 금지했고, 남문은 포클레인을 동원하여 보수 작업 중이었다. 유감스럽게 옛 산성의 모습은 보지 못하고 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