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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방화수류정 아파트 뜨락 돌더미 사이로 영산홍이 활짝 피었길래 화성에 나갔더니, 그곳엔 계절이 더딘가 이제야 꽃몽우리가 맺혔다. 공기도 맑고 하늘도 파래서 모처럼 기분이 좋았다. 바야흐로 봄기운이 한창 오르고 있었다. 팔달산에 만개한 벚꽃들과 개울가의 조팝꽃이 한창이었다. 변덕스러운 봄 날씨지만 시간의 흐름은 어찌할 수 없는가 보았다. 방화수류정 동쪽 동북포루 아래 연무동 화성 주변 정리 사업이 끝나, 지하에 주차장이 완공되어 상큼한 경관을 뽐내고 있었다. 지금은 시범운영기간이라 별도의 주차료는 받지 않는다. 다만, 동북포루가 보수공사중이어서 경관이 좋지 않은 것이 흠이었다.
3월의 꽃 햇살이 고와 밖으로 나갔더니, 완연한 봄이었다. 아파트 앞 뜰엔 살구꽃이 활짝 피었다. 살구꽃이 벚꽃보다 일찍 피나 보다. 해마다 화사한 봄냄새를 제일 먼저 알려주는 반가운 꽃이다. 살구나무 아래 돌틈에선 제비꽃이 머리를 들고 있었는데, 제비꽃의 보라색에 흰색이 점점 더해 간다. 공해 때문 변형되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니, 양지바른 곳에선 목련도 활짝 피었고 산수유, 매화꽃도 한창이었다. 명자꽃과 개나리꽃은 꽃몽오리가 잔뜩 부풀어 있었고... 문제는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인데, 일교차도 장난이 아니다. 비가 흩뿌리다가 눈발이 내비치기도 하고,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치기도 한다. 하기사 4월에도 눈 내리는 날이 있으니, 발정난 암캐처럼 믿지 못할 것은 봄날씨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
양양 낙산사 소금강 계곡에서 나와 주문진 수산 시장으로 가서 생선구이로 점심을 먹었다. 내륙에서 먹는 것과는 다른 푸짐한 생선구이였다. 다음 날, 낙산사 가는 날은 바람이 거셌다. 미세 먼지가 많아 하늘이 맑지 않았고... 핸드폰에 강풍 주의보와 산불 경보가 수시로 날아왔다. 십 몇 년 전, 산불 때문에 홍련암 하나만 남기고 모두 타버린 낙산사였기에, 산불 주의보가 실감나게 느껴졌다. 봄철 동해안 산불은 바람에 날려 이리저리 확산되기 때문에 무섭기 그지없다. 이제 낙산사엔 산불흔적은 없다. 경내를 거닐다 보니, 나무숲 아래 낙엽들을 모두 치워 산불에 대비하는 노력들이 곳곳에 보였다. 깨끗하게 정리된 낙산사 경내는 탐방객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가 도처에서 묻어났다. 양양에 들릴 때면, 대부분 지나가듯 방문하는 낙산사라 ..
오대산 국립공원 소금강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무려 사십사 년 만에 소금강 계곡을 찾았다. 예전엔 아랫마을 연곡천가에 입구가 있어서 계곡이 깊고 그윽했었는데, 이젠 청학동 윗마을까지 길이 뚫렸다. 친구들과 공사 중인 주차장을 지나 소금강 표지석이 있는 오대산 국립공원 입구까지 차를 타고 올라갔다. 그때, 하룻밤 머물렀던 청학동 산장의 추억은 아득한 세월 속에 사라져 버렸나 보았다. 사십 년도 더 지난 그 시절 산장 앞에 모닥불을 피우고 놀았는데, 밤이 깊어지자 산짐승 울음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와 으스스하게 소름까지 돋아서 산장 안으로 들어가 문을 꼭꼭 잠그고 잠을 잤었다. 팔팔하던 그 시절 청춘은 어디 가고 흰 머리칼과 쭈글쭈글한 주름만 남았다. '조여청사(朝如靑絲) 모성설(暮成雪)'이란 말이 새삼 실감이 났다. 소금..
수니온 곶 포세이돈 신전 그리스 여행 8일째, 투어 마지막 날이다. 우리나라는 며칠 째 미세먼지로 고통받고 있단다. 먼지 하나 없이 맑은 공기,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가 있는 그리스가 부러웠다. 가는 곳마다 신화가 숨 쉬고 있고 그 신화 속 인물들이 살아서 걸어 나올 것 같은 곳, 숱한 설화들이 역사로 살아 꿈틀거리는 곳이 바로 그리스였다. 400여 년을 터어키 압제에 시달리면서도 자존심을 잃지 않고 독립을 쟁취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되찾은 불굴의 나라가 그리스였다. 그리스 북쪽 테살로키니로부터 남쪽 모넴바시아까지 종주하고 아테네에서 투어를 마감하려니 아쉬운 마음도 컸다. 마지막 여정으로 아테네 남동쪽 50여키로미터에 있는 수니온 곶으로 갔다. 에게해에서 아테네로 들어오는 바다 길목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중요한 역할을 다했던 곳이..
서구문명 발상지 아테네 아테네는 천만 그리스 인구 중 절반인 오백만이 살고 있는 그리스 최대 도시답게 교통량이 많고 복잡했다. 인상적인 것은 노후 차량들이 많았다는 것이었다. 자동차 생산 공장이 없는 탓도 있기 때문이겠지만, 우리나라에서 폐차 수준을 훨씬 지난 차량들이 건재하게 시내를 활주하고 있었다. 경차 아토즈, 비토스, 마티즈, 아반테 초기형 등 한국산 차량들도 많았다. 2000cc 이상 차량은 고급차로 세금이 높기 때문에 작은 차들을 선호해서 작은 차량들이 대부분이었다. 지진 때문에 대도시임에도 고층빌딩이 없었다. 물론 우리처럼 고층 아파트도 없었고 3-4층 정도의 다가구 주택들과 개인 주택들이 대부분이어서 무엇보다도 시야가 편했다. 아테네 투어 핵심은 파르테논 신전이었다. 아테네는 서구 문명의 발상지답게 곳곳에 유적들..
사도 바오로가 구원한 코린토스 코린토는 미케네에서 한 시간 거리였다. 기원전 1000년경에 건설된 도시로, 헬레니즘 시대에 산업과 무역, 상업화된 오락 중심지로 번영을 누렸다. 그 뒤 기원전 146년경 로마 장군 뭄미우스가 도시를 해체하였다. 그 후 100여 년 정도 방치되어 있다가 기원전 46 년 경에 줄리어스 시저가 재건하였고, 후에 아카이아 지방의 수도로 발전하여 로마제국 지방 총독이 거주하는 대도시가 되었다. 지정학적으로 코린토는 아드리아 해와 에게 해 사이에 있어서, 로마나 유럽과 아시아 간의 통로를 이루는 동서 해상로와 육상로의 관문으로,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가 되어 크게 번창하였다. 그 까닭에 물질적으로 풍요로워 사치와 향락이 만연하여 제2의 '소돔과 고모라'로 불리며 방탕하고 부도덕한 도시가 되었다. 사도 바오로의 서간..
기원전 1300년전 미케네 신화와 서사시 속에 등장하는 미케네 왕 아가멤논, 아가멤논이 통치했었다는 곳이 내가 미케네에 대하여 알고 있던 전부였었다. 아가멤논과 아킬레스, 헥토르, 헬렌, 페리스의 이 이야기는 브레드 피트가 '아킬레스'로 출연한 영화 '트로이'로 재연되었었다. 몇 년 전 터어키에 갔을 때, 볼 것 없다던 트로이에서 기원전 천년이 넘는 시대 영웅들의 모습들을 떠올리며 감격했었다. 수많은 천재지변과 풍상으로 옛날 바다와 전장터도 볼 수 없었지만, 가슴속에 몰려드는 벅찬 감동이 몰려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었다. 트로이를 망하게 한 것은 미케네 왕 아가넴논의 야심 때문이었다. 그는 동생의 복수를 전쟁의 명분으로 삼았지만 복심은 토로이 정복으로 챙길 경제적 이익이었다. 그 결과, 트로이는 멸망하고, 미케네는 승리했지만, 아..
섬안의 요새 모넴바시아 스파르타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여유 있게 모넴바시아로 향했다. 비취처럼 푸르고 맑은 바다를 가진 그리스 남부 해안은 보이는 풍경마다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특이한 것은 우리나라 바닷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항(漁港)과 어선들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파도로 깎인 상처투성이 우리나라 어선들과 비린내로 가득 찬 우리나라 어항과 달리 그리스에는 항구마다 가득히 정박해 있는 것은 크고 작은 요트들이었다. 섬이 많은 바다를 가진 이들은 아마도 어업보다는 레저활동으로 올리는 수입이 더 실속이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처절한 굶주림의 고통을 겪어보지 않아서인지도...... 그리스 지방도로는 시원하게 뚫린 우리나라와 달리 좁고 구불구불했다. 노련한 운전기사는 전혀 서두르지 않고 시골길을 달렸..
300 결사대의 스파르타 미스트라 투어 후, 호텔에 여장을 풀고 스파르타 유적 탐사에 나섰다. 숙소에서 가까운 곳으로 시가 북쪽 끝 지점 축구장 앞에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가 청동상으로 재현되어 두 눈을 부릅뜨고 칼과 방패를 들고 서있었다. 영화 '300'에서 보던 근육질 단단한 사나이 모습으로 고대 스파르타 군대의 용맹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BC 480년 스파르타를 침공한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의 대군에 맞서 친위병 300명과 함께 남아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다 전사했다. 스파르타인들은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는 전설이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300 결사대에서 비롯되었다. 이 동상 앞에 서서 청동상을 바라보자니, 영화 '300'에서 재연되었던 영웅들의 장엄하고도 처절했던 전투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
비잔틴 최후의 도시 미스트라 올림푸스를 떠나 스파르타가 가까워질 무렵 차창밖으로 범상치 않은 산맥이 시야에 들어왔다. 스파르타 서쪽 산맥으로 티아게토스 산맥이었는데, 정수리가 하얀 눈으로 덮여 스파르타를 굽어보고 있었다. 지진이 심한 그리스엔 높은 빌딩이 없다. 고대 그리스 최강의 군사도시였던 현대 스파르타는 자그마한 소도시였다. 작고 나지막한 건물들이 왕복 4차선 도로를 따라 오밀조밀 모여있던 스파르타시 북쪽 끝무렵에서 그리스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식당 벽난로엔 장작불이 빨갛게 타고 있었는데, 바깥 날씨가 제법 쌀쌀함에도 종업원은 반팔 티 차림이었다. 식사 후, 잠깐 나와 습관적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더니 식당 북쪽 가파른 산 위에 작은 성채가 보였다. 사전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성채를 보며 무심코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그 성채가..
올림픽의 성지 올림피아 델피의 험준한 산에서 내려오자 햇살이 쨍하게 내비쳤다. 버스는 이오니아 해 코린토스만의 아름다운 해안을 끼고 달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아름다운 바다와 올리브 밭, 그 사이 시이에 빨간 지중해식 주택들이 바다를 향해 앉아있는 풍경들이었다. 그리스는 우리나라보다 국토는 넓지만 인구는 1000만여 명이란다. 그중 절반은 아테네에 모여 살기 때문에 그 이외 지역은 밀도가 현저하게 낮아 한가하다고 한다. 지방도로나 고속도로에도 차량통행이 복잡하지 않았다. 운전기사는 구불구불한 해안도로를 달리면서 앞차를 무리하게 추월하려 하지 않았다. 화물트럭이 앞길에서 답답하게 서행을 해도 경적 한 번 울리지 않고 여유 있게 뒤따라 갔다. 아마도 그리스식 생활습관인지도 모르겠다. 가이드에 의하면 수년 전 그리스 경제위기는..
세상의 중심 신탁의 성지 델피 칼라바카에서 그리스 첫밤을 보낸 후 08시 30분에 숙소를 떠났다. 구름이 조금 보이긴 했으나 아침햇살은 좋았다. 신탁의 성지인 델피는 남서쪽 방향이었다. 평화롭고 한적한 시골길을 달려갈수록 먹구름이 늘어나며 햇살이 변덕스러웠다. 차창 커텐으로 햇볕을 가려가며, 스쳐지나가는 풍경들을 바라 보았다. 테베의 왕이었던 라이오스는 태어난 아들이 그를 죽일 것이라는 신탁 때문에 핏덩어리인 자신의 아들을 죽이라 명령을 내렸지만, 하인은 간난아이를 차마 죽이지 못하고 남몰래 코린토스 사람에게 건네주었다. 코린토스 왕의 아들로 장성한 오이디푸스는 여행 중 얼굴도 모르는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게 되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신의 의지대로 이루어졌다. 동서고금을 통해 하늘이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을 인..
칼라바카 공중 수도원 메테오라 어린 시절 봤던 영화 중 벼랑 위 요새에, 행글라이더를 타고 은밀하게 침투해서 공격하던 장면이 인상 깊었는데, 그곳이 칼라바카 메테오라가 아닌가 싶다. 테살로니키에서 간단하게 투어를 마치곤 이내 공중 수도원으로 유명한 메테오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휴게소에서 처음으로 그리스식 점심을 먹었다. 식사 전에 먹는 둥근 빵은 터어키와 같았고, 샐러드, 돼지고기 완자와 감자가 나왔는데, 입맛에 맞아 한 접시를 모두 비웠다. 이스탄불에서 테살로니키로 오는 도중 간단한 기내식으로 아침을 해결한 탓에, 휴게소 식당에서 그리스식 점심을 배불리 먹어 포만감이 몰려왔다. 오랜 비행과 달라진 시차, 포만감으로 온몸이 노곤하여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졌으나, 차창밖 이국의 색다른 풍경을 보는 재미에 차마 눈을 감고 잘 수 없었..
마케도니아 테살로니키 그동안, 얼마나 그리스 여행을 꿈꾸었는지 모르겠다. 여행사에 예약을 했다가 번번이 취소되곤 했다. 여행사에 개인적으로 당부도 해보았지만, 내가 대단한 손님도 아닐진대 기억했다가 성의껏 안내해줄 여행사들도 아니었다. 그리스 여행지로 산토리니가 성황 중이라지만, 애당초 그곳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크레타섬이라면 모를까 배를 타고 편도 8시간을 소비하며 그저 이색적인 풍광을 본다는 것은 지루하고도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숱하게 들어왔던 신화 속의 나라였던 만큼, 그리스가 유럽 여행의 시작이 되어야 했었을 것을, 유럽 내 이 나라 저 나라들을 다니며, 숱한 가톨릭 성당들에서 세월의 흔적과 그 규모에 감탄했었다. 신화의 나라는 어떤 모습일까. 올림픽 때마다 옛 올림피아 헤라 신전에서 성화를 채화하여 ..
고성 천학정 청간정에서 통일전망대로 가는 길가에 이정표를 보고 따라간 천학정은 해안가 벼랑 위에 세워놓은 야트막한 정자였다. 천학정에 올라 관리인을 만났는데, 눈인사를 하니 벙어리 말문 터지듯, 이것저것 설명을 해주었다. 천학정은 일제 때인 1930년대 세워졌는데 이 정자 뒤의 둥근 동산의 모습이 학의 알처럼 생긴 데다가 학들의 서식지였기 대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전했다. 게다가 동산 봉우리 30여 미터 아래 소나무는 수령 1500이란다. 1500년 이전이라면 삼국시대쯤인데, 그때의 소나무가 현존하고 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비전문가인 내가 봄에는 수령이 많아야 300년 정도쯤으로만 여겨지는데... 나무 아래 너럭바위가 있는데 제단으로 쓰였다고 한다. 그동안 풍상에 시달리고 청간정 아래 도로를 개설되면서 산세가 기울어..
양양 휴휴암 주문진에서 양양으로 가는 길가 얕은 언덕 너머, 바닷가에 있는 작은 암자 휴휴암을 찾았다. 몇년 사이 작은 변화들이 보였다. 휴휴암 들어가는 도로변에 주차장을 넓게 만들어 관람객들의 편의를 돕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를 타고 4-500m정도 되는 암자까지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아 보행자들의 안전에도 위협이 되고 있었다. 그 사이 암자 앞 바닷가 너럭바위 한가운데 용왕을 모시는 제단이 만들어졌고, 암자내 상업시설들이 좀더 들어서 있었다. 또, 너럭바위 주변에 방생용 치어들을 판매하는 수조와 먹이 판매소도 있었는데, 그 덕인지 너럭바위가엔 양어장처럼 커더란 물고기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물고기 떼 가까이 오리들과 갈매기들이 함께 있었는데, 안내문에 의하면 이곳 오리들은 물고기들을 잡아먹지 않아 물고기..
고성 통일전망대 전날 밤 건물을 날릴 듯했던 강풍은 새벽에서야 잠들었다. 맑은 하늘, 따뜻한 날씨는 동해 절경들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금강산 관광이 끊어진 지 10여 년, 고성 통일 전망대로 갔다. 옛날 전망대 옆에 P자 형태로 새로 지어 2018년 12월 28일 개장한 전망타워가 돋보였다. 주변을 돌아본 뒤 4층 전망타워에서 조망하다가 사진을 찍기 위해 3층 엘리베이터 옆 공간으로 내려가 유리창 없는 공간에서 시원하게 금강산 일부분과 구선봉, 해금강 일대를 바라보며 사진 몇 장을 찍었다. 금강산을 찍겠다고 무거운 500mm 망원렌즈를 들고 가서 북녘땅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었다. 군사지역을 찍는다고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기야 금강산 관광 가던 시절엔 수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곳이었고 남북 화해모드로 일부 GP도 ..
고성 DMZ박물관 고성 통일전망대 부근에 커다란 최신 건물의 DMZ박물관을 견학했다. 남북 화해모드에 따라 2006년 3월 남북관광교류타운으로 공사를 착공했으나, 2008년 12월 강원도 DMZ박물관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2009년 8월 14일 개관했다. 설립 목적은 남북한 분단의 현장을 안보, 평화, 관광 거점 지역으로 중점 육성하고 미래 통일시대를 대비하여 비무장지대(DMZ)를 세계적인 역사문화의 관광명소로 만들기 위해서라는데 그 규모가 매우 컸다. 무료입장이었는데, 통일 전망대를 관람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들리는 듯, 관람객들이 제법 많았다. 각종 자료들을 입체화하여 비무장지대를 재현했는데, 볼만한 것들이 많았다. 조선의 멸망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냉전시대 열강들 틈에서 분단되어 동존상쟁의 전쟁까지 치른 한반도의 비극을..
주문진 소돌해변 주문항에서 생선구이로 점심을 먹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활기찬 수산시장이 아닌가 싶다. 규모가 크기도 하지만 값이 싸기로 유명한 곳이어서 구경할 겸 들렸는데, 수산시장을 새로 정비해서 예전과 다른 곳이 되어 있었다. 오징어가 풍년이라더니 그것도 딴 말이었다. 요즘 잡히는 것은 오징어 새끼처럼 작아서, 소위 총알오징어라는 것이었는데, 만원에 다섯 마리, 3만 원에 20마리가 시세였다. 수산시장 어귀 골목 생선구이집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반찬이 형편없었다. 모둠구이 중짜가 3만 원이라는데, 공깃밥은 별도이고, 반찬은 네 칸으로 나뉜 세트 접시에 소량으로 담겨 나왔다. 우리 동네 생선구이집에 가면, 그 값으로 깨끗한 식당에서 맛있고 정갈한 반찬으로 먹을 수 있는데, 꾀죄죄한 골목식당에서 내 돈 내고도 꿔다 논..
여주 황포 돛배 산속이 아닌 강변에 위치한 사찰로 우리나라에서는 신륵사가 유일하지 않을까. 강천섬에서 신륵사로 이동해서 부근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사람들이 많아 한참을 지체했다. 신륵사에 들어 가려다 강변에 있는 황포돛배 나루를 보곤 그리로 가서 황포돛배를 탔다. 선착장에서 매표하는데 한 사람당 6000원이라 운항시간과 주변경관에 비해 싼값은 아니었다. 황포돛배는 외양만 돛배일 뿐 발동선으로 신륵사 쪽 나루에서 운행하는 배는 황포 외돛이고, 맞은편 강변 나루에서 운행하는 것은 황포 쌍돛배로 각각 두 척씩 운행하고 있었다. 신륵사에서 가까운 여주대교 부근까지 내려갔다가 신륵사 부근 상류에서 회항해서 돌아오는 것이었는데 약 25분 정도 소요되었다. 색다른 풍경을 기대했었는데,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4대 강 사업으로 ..
여주 강천섬 은행나무길 휴일날 영동선은 언제나 교통이 혼잡스럽다. 버스전용차량제까지 실시되고 있어서 더더욱 심한 것 같다. 경부선에 비하면 버스들이 그리 많지 않은데... 일률적인 버스전용차량제보단 도로 상황에 따라 실시하는 것도 좋을 듯싶다. 강릉까지 KTX까지 개통되었으니 말이다. 마성터널 앞에서 경찰관들이 버스전용차로를 달리는 승합차들을 검문하고 있었다. 이른바 6인 미만이 탔음에도 전용차로를 기분 좋게 달리다가 단속에 걸려 쩔쩔매는 모습들을 보니, 한편으론 고소하기도 했다. 정체되어 앞으로 나가지 못하기에 용인에서 국도로 빠져 체증을 피해보려 했으나, 막히기는 마찬가지였다. 양지 가는 길에 2차로를 막고 보수공사하는 모습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교통이 원활한 평일 낮에 보수공사를 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창경궁의 가을 낙선재를 돌아보고 성정각 앞 언덕에서 입장권을 사서 창경궁으로 넘어갔다. 입장권은 창덕궁은 3000원 창경궁은 1000원인데(여행주간은 50% 할인), 아마도 전각의 규모에 따라 가격이 다를 것으로 유추해 보았다. 일제가 동물원으로 훼손시켰던 궁을 복구한 탓으로 고궁의 떨어진 탓도 있겠으나, 내 개인적 취향으론 창경궁이 창덕궁보다 친숙하다. 비원이라 불리기도 했던 창덕궁 후원과 창경궁 뒤뜰은 담장 하나 차이다. 아마도 일제가 창경궁을 훼손하면서 인위적으로 담장을 쌓아 구분해 놓지 않았을까 짐작해 보았다. 창경궁 후원은 좁기는 하지만 내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공간으로 복원된 춘당지 주변은 가을단풍이 매우 아름답다. 가을 단풍을 교외나 산에서 즐기는 것이 아니라 도심 속 한가운데 고궁에서 즐기는 오묘한 맛..
가을 창덕궁 오랜만에 방문해 보는 창덕궁, 토요일이라 관람객들이 많았다. 매표소까지 줄이 길게 늘어서 있어서 후미에 섰다가 차례를 기다려 입장권을 구입했다. 여행주간이라며 50% 할인해 주었다. 창덕궁 후원 관람은 이미 매진되어 구중궁궐 그윽한 비경은 감상할 수가 없다. 그러나, 창덕궁 후원만큼 아름다운 창경궁 후원이 있으니 낭패는 아니었다. 사람들이 많아 사진찍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휴일에 고궁을 찾은 내 탓인 걸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동선을 따라 정문인 돈화문에서 진선문 인정문 선정문 대조전 성정각을 지나서 낙선재까지 걸으며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를 만끽했다. 구름 많은 날이라 햇볕은 들쭉날쭉하고, 바람이 강해서 날씨가 쌀쌀했다. 바람이 휘몰아쳐 낙엽이 떨어져 휘날릴 때마다 관람객들의 탄성이 터지곤 했다. ..
화성시 용주사, 융건릉 가을 날씨답게 하늘이 푸르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었다. 입방정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일본을 관통하는 태풍 탓인지 모처럼 푸른 하늘이 이어지고 있다. 맑은 하늘 덕에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용주사에 도착하니 주차된 관광버스가 보였다. 사람들이 많으면 아무래도 사진 찍기가 어려워진다. 매표소에서 약간 실랑이를 하고 현금으로 인장권을 샀다. 대부분 절간에선 카드를 받지 않는다. 며칠 전 불국사는 전과 달리 카드결제를 하고 있더만... 현금 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대부분 지갑에 현금을 넣고 다니지 않기 때문이다. 지갑을 탈탈 털어 천 원짜리들을 모아서 입장료를 내며 싫은 소리를 했더니 매표소 직원은 처음엔 결제시스템이 없어서라더니 나중엔 윗사람들이 하라는 대로 할 뿐이랬다. 스님들의 현금 사랑이 ..
경주 양남 주상절리와 감포 세월이 유수와 같단 말이 더더욱 실감이 났다. 과거 걷거나 말 타고 다니던 시절에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거늘 오늘날 디지털 시대엔 오죽 빠르랴 싶다. 정확히 6년 전 경주시 양남면 하서리항에서 읍천항까지 이른바 양남 파도소리길 1km를 왕복해서 걸으며 완상한 적이 있었다. 해안을 따라 걸으며 바닷가의 오묘한 주상절리 암석들을 감상하는 묘미가 있었는데, 이번 방문에는 내비게이션이 아예 이곳의 압권인 부채꼴 주상절리로 안내해서 그만큼 걷지도 않고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과거 군부대와 철조망이 있었는데, 이젠 말끔히 걷어내고 부채꼴 주상절리가 바로 보이는 언덕 위에 지상 4층의 전망대가 우뚝 서있었다. 좁은 해안가 도로 탓에 주차가 문제여서 국도인 2차선 좁은 길엔 엄두도 내지 못하고, 도로 주..
경주 불국사 날씨가 흐렸다. 지난번 이곳에 왔을 때는 석가탑을 보수하는 중이어서 다보탑과 쌍을 이루는 아름다움을 볼 수 없었다. 보호 유리집을 떼어낸 석가탑을 보기 위해 불국사에 갔는데,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연휴를 맞아 경주를 여행하시는 분들은 모두 이곳에 모인 것 같았다. 환한 웃음꽃을 피우며 담소하는 남녀노소 탐방객들, 외국 사람들도 많아서 세계문화유산다운 국제적 명소다웠다. 하기야 장대하고 크지만 우중충하고 음산한 일본의 절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아담한 모습으로 부드러우며 온화한 우리나라 사찰의 모범이 될 성싶다. 동남아시아의 금박 물린 화려함은 천박스럽고, 하늘로 치솟는 추녀 끝의 곡선도 가식적으로 보이는데, 불국사는 온화하고 중후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우리만의 절집이었다. 그뿐 이니라 우아한 아치의 청운교 ..
경주 박물관과 안압지, 계림과 교촌마을 경주 여행 마지막 날, 날씨가 맑고 상쾌했다. 맥없이 늘어지던 흐린 날보다 쨍하게 맑은 청명한 날이 너무 좋아 떠나야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아침 일찍 조반을 먹고 박물관 투어에 나섰으나, 개장시간이 10시란다. 안압지를 먼저 들를 것을... 순서를 잘못 정했다. 되돌릴 수도 없고 박물관 뜰을 거닐며 고운 햇살을 안고 야외전시물들을 완상하며 시간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박물관 안에 사람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들어온 젊은 가족들을 비롯해서 3대가 다정히 입장하는 손님들도 많았다. 우리 역사의 견문을 넓히며 여행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스트레스 날리는 놀이공원도 좋겠지만 우리 옛것을 안고 살아가는 온고지신이 값진 일이라 생각한다. 개장 시간에 맞춰 박물관에 입장하여 관람을 마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