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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베니아 줄리앙 알프스 슬로베니아 국경에서 홍역을 치르고 캄캄한 밤에 호텔로 돌아왔다. 어둡고 좁은 산골길이라서인지 버스 기사는 몇 번을 되돌려 길을 찾았다. 캄캄한 밤이라서 여장을 풀 새도 없이 잠 속에 빠져 들었다. 새벽에 깨어 뒤치다꺼리다 다시 잠들었다 일어나니, 창밖에 동이 트고 있었다. 창밖엔 높고 험한 알프스 산봉우리들 한 구석부터 햇살이 퍼져가기 시작했다. 먼지 하나 없는 청정한 대자연 속이었다. 밖에 나와 보니, 호텔은 호수 곁에 있었다. 밤중에 도착한 터라 주변 경관을 볼 수 없던 탓이었다. 아침 일찍 낚싯대를 들고 나서는 사람이 있어 그를 따라가다가, 호수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길이 나지 않은 푸른 초원 위에 아침 이슬이 신발 위로 떨어져 흘렀으나, 개의치 않았다. 초원 끝, 숲가에 텐트를 치고 야영하는 ..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자다르에서 크로아티아 북서쪽, 슬로베니아 국경과 가까운 자그레브로 갈수록 목축지가 많아졌다. 대체로 이 나라는 석회암지대로 농사지을 땅이 별로 없어 보였다. 내륙의 대부분은 돌산과 구릉지대여서 작은 마을들이 띄엄띄엄 형성되어 있었고, 그나마 아드리아해에 접한 해안지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도시를 이루는 듯했다. 걷는 것보다 버스를 타고 이동했던 시간이 더 많은 여행이어서 창가에 스치는 풍경들이 대체로 그랬다. 수도 자그레브는 크로아티아에서 마지막 여행 일정이었다. 자그레브를 거쳐 슬로베니아로 넘어가야 하기 때문에 일정을 서둘렀는데, 결국 국경에서 사고를 내고 말았다. 슬로베니아 입국 관리들은 버스 승객들을 별도로 심사했는데, 가뜩이나 국경을 통과하려는 차량들이 긴 줄을 서서 하염없이 기다렸지만, 그들은 ..
크로아티아 자다르 쉬베크에서 가까운 크르카 국립공원 앞 호텔 Vrata Krke에서 1박 했다. 불행히도 침실이 호텔 3층 정면으로 돌출된 낮은 지붕의 방이어서 천정이 낮고 무더웠다. 모기가 걱정돼서 문단속을 단단히 한 터라 몹시 무더웠으나 인내하며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서 문득 천정을 보니 에어컨이 달려 있는 것이었다. 벽에 붙은 전원을 켜니 시원하게 잘 돌아갔다. 다른 방은 에어컨이 없었지만, 다락방이라 설치했던 모양이었다. 억울해도 헛일이었다. 내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 호텔 창밖 국립공원의 풍경만 시원스러웠다. 북쪽의 자다르와 오클레시안 궁전이 있는 스플리트의 중간지점이 쉬베닉이었다. 자다르는 고대엔 로마, 중세에는 베니스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로마 유적이 많은 바닷가 도시다. 베니스 지배 당시 쌓았다는 두터운..
크로아티아 쉬베닉 보스니아 메주고리예에서 국경을 넘어 다시 크로아티아 쉬베닉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기분 좋게 여겼던 보스니아 인상이 구겨지는 일이 생겼다. 한적한 도로에서 교통경찰에게 단속된 것인데, 가이드에 의하면 교통경찰관이 차를 세우곤 까닭 없이 20 유러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과거 90년대까지 우리나라가 떠올랐다. 그땐 교통경찰에게 단속되면 면허증 밑에 만 원짜리 한 장 접어 끼워주는 것이 상례였다. 그 시절 나도 무단 유턴하다 걸렸는데, 경찰관이 저녁도 못 먹었다며 투덜대었다. 어쩔 수 없이 만원 짜리 지폐 한 장을 주었더니 이러면 안 된다며 면허증 밑에 접은 지폐를 함께 줘야 보기도 좋다며 연습까지 시켰다. 어찌 보면 서로 윈윈이라 나쁠 것도 없겠지만, 피차 모두 분명한 범법 행위임에 틀림없다. 우리나라엔 이..
보스니아 메주고리예 메주고리예 마을은 협곡 위 고원지대에 있었다. 크로아티아나 보스니아 대부분의 지형은 석회암지대로 구릉이나 협곡들이 많았다. 버스는 협곡 지대 마을을 지나 가파른 언덕을 올라 고원지대로 올라갔다. 메주고리예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1981년 마을 뒷산 중턱에서 여섯 명의 처녀들에게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신 곳으로 유명해진 곳이다. 다만 포르투갈의 파티마처럼 로마 교황청에서 정식으로 인정한 곳은 아니다. 메주고리예 성모 발현지는 돌길로 몹시 험했다. 그리 뾰족하고 날카로운 돌길은 아마 처음 본 듯하다. 그 돌길을 수많은 순례자들이 밟고 다녀 그 돌 끝이 닳아 반질반질했다. 작은 돌이나 맨 땅을 딛으려 애쓰며 언덕길을 올랐다. 놀랍게도 맨발로 그 험한 길을 오르내리는 순례자들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톨릭 기..
보스니아 모스타르 크로아티아 드브로브니크에서 다시 국경을 넘어 보스니아 모스타르로 향했다.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모스타르 인근으로 접어들자 보이는 풍경이 사뭇 달랐다. 교회 첨탑보다 모스크 미나르가 더 많이 솟아 있었다. 그 만 회교도들이 많다는 것이었는데, 오스만 트루크 체제에 순응하기 위한 개종이 많았으리라고 전한다. 사람들이 크로아티아보다 유순하고 친절한 느낌이었다. Blagaj 호텔에 들었는데, 직원들이 친절했다. 손님들이 더울까 봐 객실에 에어컨까지 미리 켜 두는 배려도 있었다. 식사 시간에 젊은 직원이 다가와 호텔 5분 거리에 유명한 곳이 있다며 같이 가보자고 했다. 말하는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듣는 우리가 긴장까지 했을 정도였다. 자신이 직접 안내하겠다고 해서 뒤따라 나섰다가 앞서간 그룹을 따라가지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아침 보스니아 네움에서 버스를 타고 출발하여 두브로브니크 시내로 들어가는 다리 앞에서 승합버스로 갈아탔다. 두브로브니크 성채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전망대 오르는 길은 좁고 험해서 대형버스는 불가능했다. 승합차는 갈之자로 산등성이를 구불구불 휘돌아 돌아 전망대에 올랐다. 전망대까지 성으로부터 올라오는 케이블카가 운행되고 있었다. 케이블카가 더 빠르겠다는 말에 탑승객들이 너무 많아 오히려 지체되기 때문에 승합차가 편리하단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성과 도시의 새빨간 지붕들은 검푸른 바닷빛과 대비되어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지중해 연안 주택들의 지붕은 어딜 가나 빨간색이었지만... 내려갈 때도 역시 승합차를 타고 험한 길을 돌아서 갔는데, 대부분 일방통행로여서 놀랐다. 성 안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
보스니아 네움 스플리트 투어 후 드브로브니크로 가기 위해 보스니아 네움에서 숙박했다. 크로아티아는 아드리아해 동쪽 해안을 길게 차지하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스플리트와 두브로브니크 사이에 해안선이 끊겨 있었다. 1718년에 체결된 파사로비츠 조약의 결과 달마티아의 거의 전역이 베네치아 공화국령이 되었지만, 베네치아 공화국과 오스만 제국의 보호국이었던 라구사 공화국(현재의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이며 당시에는 도시 국가 상태였음) 사이의 분쟁을 막기 위해, 네움은 양자 간의 완충 지대로서 오스만 제국령이 되었다. 이때 확정된 국경선이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의 복잡한 분쟁을 거치면서도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네움(보스니아어: Neum)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바다로 통하는 유일한 해안지대이다. 이 작은 바닷가 마을..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폴리트비체로 몰려드는 인파를 뒤로 하고, 근처에서 송어 구이로 점심을 먹고, 로마시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지었다는 스플리트 궁전으로 이동했다. 스플리트는 크로아티아의 중부 달마시안의 항구 도시로 아드리아해로 나가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디오클레시안 궁전은 로마시대에 지은 궁전으로 현재까지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7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 궁전의 남쪽 성벽은 본디 바다에 접해 있었으나 후대에 바다를 메꾸어 확장하여 도로를 만들었다. 그동안 로마 시대의 성벽 안에 사람들이 살아왔기 때문에 건축물들은 지속적으로 개축되어왔다. 궁전 안 건물 아래층은 지금도 여러 가지 상업시설로 활용되어 현지인들의 삶의 터전이 되고 있다. 성 안 통로들은 좁고 건물들은 오래되어 낡고 노후되..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 드디어 기대했던 발칸 여행 하이라이트인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에 왔다. 그동안 사진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모습을 기대하며 현지 가이드를 따라 매표소를 통과하여 첫 전망대에 당도했는데, 아뿔싸, 건기라서 수량이 줄어들어, 텅 빈 주전자에서 짜내는 물처럼 폭포물이 졸졸 떨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그 먼 길을 고생해서 예까지 왔는데, 실망한 정도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비교대상은 아니지만 떨어지는 폭포보다는 구경 나온 수많은 유람객들이 더 대단해 보였다. 어쨌거나, 세계 자연유산으로 지정되기까지 한 폴리트비체 국립공원이기도 하니까, 사람들의 뒤를 따라 일행과 떨어지지 않으려 조심하며, 폭포 아래까지 갔다. 물줄기가 가늘었지만 폭포는 폭포였다. 창덕궁 뒷뜰, 작은 바윗돌에서 실날같이 떨어지는 물줄기를 어마어마한 폭포..
크로아티아 라스토게 로빈 관광 후, 자그레브를 조금 지나 카를로바츠에서 하룻밤을 잤다. 이른 아침에 숙소를 떠났는데, 안개가 자욱했다. 이 지역은 신통하게도 날씨가 조석으로 선선했다. 열대야가 기승부리는 우리나라 폭염과 차이가 많았다. 한낮에 무더울 것으로 예상했음에도, 생각보다 그리 덥지 않았다. 9시에 개장한다는 인형 마을은 아직 열지 않았다. 입구에서 조금 기다렸다가 정각 9시 개장 후 마을에 들어갔다. 마을 입구에 플리체비체의 축소판처럼 작고 아기자기한 폭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예전에 작은 폭포에서 물을 끌어들여 물레방아를 만들고 방앗간에서 밀을 빻았었단다. 지금은 쓰지 않는 물레방아만 한 구석에 뎅그랗게 놓여 있고, 널찍한 잔디 마당 주변으로 작은 폭포들이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었다. 예전 TV 예능프로..
크로아티아 로빈 슬로베니아 피란에서 국경을 지나 한 시간 거리에 있는 크로아티아 해변 도시 로빈으로 내려왔다. 유럽에서 국경을 지나며 여권심사를 받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국경 검문소를 수월하게 통과할 때도 있지만 운 나쁠 때면 별 이유도 없이 까탈을 부릴 때가 많다고 한다. 여행의 끝 무렵 크로아티아에서 슬로베니아로 들어오는 날 이 횡포 때문에 국경 검문소에서 두 시간 이상 지체했다. 우리 3 공화국과 유신 시절에 도로 길목마다 서슬 퍼렇던 검문소들이 생각났다. 도로 길목 검문소에서 군인들과 경찰들이 날카롭고 위압적인 시선으로 승객들을 쏘아보며 간첩을 색출하기 위해 검색하는 것이었는데, 대부분 검문에 걸리는 것은 휴가 나온 군인 쫄병들과 간 밤 꿈자리 사나웠던 소시민들이었다. 이 검문으로 간첩 잡았다는 말은 제대로 듣지..
슬로베니아 피란 옛 유고슬라비아에서 1991년 독립한 인구 200여만 명의 슬로베니아는 2017년 기준, 국민 소득 21,062달러로 독립한 유고연방 다른 국가보다 월등한 국민소득을 지닌 나라이다. 북쪽으로 알프스 산맥을 접하며 북서쪽에 이탈리아, 북쪽엔 오스트리아, 동북 녘에는 헝가리, 남쪽엔 크로아티아와 국경을 마주 한다. 아드리아해에 40여 km의 짧은 해안을 가진 덕에 해양으로 통하는 숨통이 트여 있다. 평소 들어보지도 못한 슬로베니아 남서쪽 해안 마을 피란이 첫 번째 방문지였다. 우리나라 드라마 배경으로 나왔던 마을이라는데, 드라마에 관심 없는 탓에 버스가 태워다 주는 대로 작은 마을에 도착해서 간단한 투어를 시작했다. 이탈리아 베니스 해안이 멀리 바라다 보이는 항구 도시 피란은 깨끗하고 아름다운 해안 마을이었..
슬로베니아 피란까지 여정 2019년 8월 13일 화요일 새벽에 기상해서 5시 25분 공항버스를 탔다. 7시에 인솔자를 만나 E창구 루푸트 한자 창구에서 발권했다. 인터넷 티켓팅 할 때, 좌석이 떨어져 걱정했으나 창구 직원이 19 JK로 창가 자리에 이어 붙여서 발권해줬다. 오전 10시 15분 인천을 떠나 뮌헨까지 10시간 20분 걸려 13시 35분경 도착한다. 시차는 7시간으로 우리 시간 오후 6시 35분이니까 낮에만 비행한다. 창가에 앉았는데 날개 중간 윗자리라 창밖이 잘 보이지 않았다. 비행 중에는 태양빛이 강해서 창문을 내내 닫고 있었기 때문에 창밖 풍경을 볼 수도 없었다. 화장실에 가려면 두 사람 앞을 빠져나가니까 몹시 불편했다. 장거리 여행시엔 복도 쪽이 편리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좁은 자리에서 마음대로 뒤척이지도..
유엔군 초전 기념비 국도 1호 화성시 병점에서 오산시로 넘어가는 죽미령고개에 있는 유엔군 초전기념비. 죽미령 고개는 6.25전쟁 당시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미 육군이 싸운 최초 전투지이다. 1950년 7월 5일 빠르게 남하하는 북한군을 막기 위해 일본에서 급파된 미 24사단 찰스 스미스 중령이 지휘하는 406명의 특수임무 부대원들이 이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스미스 부대원들의 특수 임무는 남침하는 북한군을 저지하여 그들의 속도를 지연하는 것이었다. 애석하게도 스미스 부대원들은 북한군에 대한 정보와 전투준비 부족으로 제대로 싸워보지 못한 채 150여 명이 전사하고 26명이 실종되는 손실을 입고 후퇴하고 말았다. 이 전투는 북한군이 미군과 벌인 최초의 전투로 이후 북한군은 이전의 남침 속도를 내지 못하였다. 그 결과 ..
항왜전적지 독산성 뉴스를 보면 답답하다. 7월 3일부터 아베의 수출제한 정책 때문에 금시라도 우리 경제가 폭망 할 것 같은 불안에 휩싸인다. 아베가 이런 술책을 2013년부터 고려했다고 하니, 시한폭탄이 이제야 터진 듯싶다. 그동안 뿌리 없이 성장해 온 우리나라 재벌들의 회사경영이 위기를 맞고 있다. 진퇴양난에 빠져버린 우리 상황을 보며, 그간의 외세침략사를 되새겨 보았다. 국난 극복노력에 힘쓴 것은 무명 백성들이었는데, 이번에는 어찌 될는지... 소시민이 할 수 있는 극일방법은 일제 불매 운동이다. 내 가진 것 중 일제는 카메라밖에 없는데, 그것마저 죄스럽다. 사드 때는 시진핑에게 당하고, 노동 임금 받지 못한 징용 갔던 사람들 못 받은 임금 갚으라는데, 쪼잔한 아베가 오히려 매를 들고 버릇을 가르치려 드니 적반하장도 ..
광교 호수공원
안동댐과 안동 문화관광단지 월영교에 도착했을 땐 기어코 빗방울이 떨어졌다. 어쩔 수 없이 인근 편의점에서 우산과 벌에 쏘인 곳에 바를 약품을 구입했다. 안동댐을 건설한 후, 그 아래 강을 건너지르는 예쁜 다리를 놓아 시민들의 휴식공간을 만들었는데 이름도 아름다운 '달이 비추는 다리'였다. 다리 가운데 정자를 세워, 운치를 더한 데다가 야간 조명시설을 설치해, 밤 경치가 더 아름다울 듯했다. 넓은 강과 푸른 산, 그리고 인공의 다리가 조화를 이루어 보기에 좋았다. 날씨는 궂었지만 투명 우산을 때리는 빗소리가 어린 시절 비 맞으며 멱감던 추억을 떠올렸다. 비 내리는 월영교 풍경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안동시는 아예 이 지역을 하나로 묶어 월영교를 건너 민속촌과, 민속박물관, 고개 넘어서는 리조트와 문화관광단지를 만들었다. 초행인 우리..
독립운동가 이상룡선생의 생가 안동 임청각 안동시내에서 하룻밤을 잤다. 태화동에 모텔들이 많았는데, 처음으로 무인모텔에 숙박하는 진기한 체험을 했다. 방처럼 나눠진 1층 주차장에 차를 대면 전동 셔터가 닫히고, 계단으로 2층에 올라 객실입구 모니터를 터치하며 계산을 하면 객실에 들어갈 수 있다. 놀랍게도 머리맡에 있는 스위치를 켜면 천정 가운데 사각 스크린이 열렸다. 세상 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에 놀라며, 이 장치를 고안한 건축가의 창의성에 탄복했다. 아침 일찍 숙소를 나와 근거리의 임청각을 찾았다. 아쉽게도 날씨가 잔뜩 흐려 빗방울이 곧 떨어질 것 같았다. 작년에 문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독립운동가 이상룡선생의 생가인 임청각을 언급하여, 그때부터 방문을 벼뤘다가 이제야 찾아오게 되었다. "임청각은 1519년 조선 중종 때 이명이 건립한 건물..
안동 하회마을과 부용대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제대로 실감 났다. 우리 아이들 어렸을 때(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이곳을 방문한 후라 이곳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을 때) 이곳에서 하룻밤 민박했던 적이 있었다. 밤 사이 애들이 모기에 물려 얼굴 곳곳이 빨갛게 부풀어 올랐었다. 그 시절엔 마을 안 민박집 마당에 주차했다. 그 사이 하회마을 입구에 주차장을 크게 만들고, 장터까지 만들었다. 마을까지 걸어 들어갈 걱정을 했는데, 반갑게도 셔틀버스를 무료로 운행하고 있었다. 셔틀버스 운행 소요 시간은 1 분이었다. 셔틀버스에 내려 뙤약볕에 걸어 다닐 엄두가 나지 않아 입구에서 전동 3 륜 3 인승 오토바이를 2만 원에 빌려 탔다. 3륜 오토바이는 핸들이 뻑뻑해서 잘 돌아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오토바이 경험이 ..
풍기 금선정과 금양정사 햇살이 좋아 햇살 때문에 금선정을 찾아갔다. 친구들과 안동 가는 길이었는데, 햇살이 좋지 않았다면 들리지 않았을 것이었다. 친구들에게 아름다운 명승지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살짝 있었지만, 이름 없는 시골 마을 작은 골짜기 정자가 마음에 들지 않을까 내심 걱정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몇 년 전 가을에 왔을 때, 금선정은 풍상에 씻긴 그대로 고색창연한 모습이었는데, 아뿔사 그 사이 전면 보수를 해서 낯선 모습으로 서있었다. 정자를 에워싼 담과 축대도 새 돌로 쌓았고, 정자 지붕에 기와도 새것으로 바꿔 덮었다. 마치 세월의 때가 잔뜩 묻은 고택을 찾아왔는데,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들을 벗겨내고 새로 지은 신축건물을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가까운 거리도 아니어서 모처럼 마음 크게 먹은 방문이었는데 그동안의 ..
정선 아우라지 "아우라지 강가에 수줍은 처녀/ 그리움에 설레어 오늘도 서있네 뗏목 타고 떠난 님 언제 오시나 / 물길 따라 긴 세월 흘러 흘러갔는데 (후렴) 아우라지 처녀가 애태우다가/ 아름다운 올동백꽃이 되었네. 아우라지 정선에 애달픈 처녀 / 해가 지고 달 떠도 떠날 줄 모르네 뱃사공 되신 님 가면 안 오나 / 바람 따라 흰 구름 둥실둥실 떴는데" (현대 가요 '정선 아우라지')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너주게 싸리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박은 / 낙엽이나 쌓이지 잠시 잠깐 님 그리워 / 나는 못살겠네." (전래 민요 '정선 아우라지') 밤새 내리고 못다 내린 빗방울들은 미련이 남아서인지 산 중턱에 구름 안개로 걸터앉아 호시탐탐 중력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었다. 쨍한 햇살을 기대하고 여행길에 나섰으..
수원 나혜석 거리 수원시 인계동 나혜석 거리 입구 나혜석 거리의 끝, 나혜석 좌상 뒤 석벽에는 그녀의 시 "인형의 가(家)"가 새겨져 있다. 인형의 家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 때 기뻐하듯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는 위안물 되도다. 남편과 자식들에 대한 의무같이 내게는 신성한 의무 있네 나를 사람으로 만드는 사명의 길로 밟아서 사람이 되고저 나는 안다 억제할 수 없는 내 마음에서 온통을 다 헐어 맛 보이는 진정 사람을 제하고는 내 몸이 값없는 것을 내 이제 깨닫도다 아아 사랑하는 소녀들아 나를 보아 정성으로 몸을 바쳐다오 맑은 암흑 횡행(橫行)할지나 다른 날 폭풍우 뒤에 사람은 너와 나 (후렴) 노라를 놓아라 최후로 순순하게 엄밀히 막아 논 장벽에서 견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
수원시 중국식 정원 월화원(粤华苑) 가시거리와 구름이 좋아 월화원에 나갔다. 미세먼지 없이 상쾌한 날씨였는데, 구름이 너무 많아 햇빛이 일정하지 않았다. 볕이 날 때를 기다리자니 지루하기 그지없었다. 부러진 왼 손목도 아직 낫지 않았고, 이따금 나타나는 뙤약볕엔 머리가 따가웠다. 사진 촬영에 썩 좋은 환경은 아닌가 싶었다. 주변에 높은 건물들이 많아 스카이 라인이 살아나지 않는 듯, 아름다운 정원의 멋이 반감되었다. 월화원은 중국 광동성과 우호교류 발전 협약으로 중국 광동성이 수원에 지어 2006년 6월에 개장한 중국식 정원이다. 중국 명나라 말 청나라 초기 영남지역의 민간 정원으로 전통양식을 따랐다. 경기도는 2003년 협약에 따라 광둥성 광저우[廣州]에 있는 웨시우 공원[越秀公園] 안에 해동 경기원(海東京畿園)을 조성하였다. 2005년..
왼손목 골절 치료 지난 5월 초 운동하다 뒤로 엉덩방아 찧면서 손을 뒤로 짚었는데, 넘어진 후 주저앉아 팔을 보니 아뿔싸 왼 손목이 부러져 팔이 뒤틀려 있었다. 동호인들의 도움을 받아 구급차를 불러 황급히 정형외과에 달려갔는데, 단순골절이 아니라 분쇄골절인 데다 부러진 팔뼈가 손목 안으로 밀려 들어갔단다. 다음날, 마취 후 수술하고 5일간 입원했다. 보름 후 실밥을 뽑고 팔목 보조대를 착용하며 지냈는데, 불편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한 달이 지난 지금, 수술한 상처도 아물고 부러진 뼛조각들도 잘 붙은 듯 하지만 아직도 손가락과 손목 관절이 자유롭지 않고, 움직일 때마다 띠끔띠끔거린다. 의사 선생님 말씀으론 관절운동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데, 혹시 무리해서 탈골되지 않을까 무척이나 조심스럽다. 조각난 뼛조각을 붙이기 위해 ..
영통 청명단오제 작년에 600년 묵은 느티나무가 쓰러지고 나서 단오제 행사장이 바뀌었다. 그동안 느티나무는 수원 영통의 상징이어서, 단옷날 나무 아래서 당산제도 함께 열렸었는데, 이제 박제 처리해서 고목 밑동만 썰렁하게 남은 그곳에선 차마 단오제를 치를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 까닭에서인지 느티나무 없는 청명역 근처 영통사 공원으로 행사장을 옮겼는데, 파라솔까지 준비하는 등, 그 모양이 예년과 많이 달라졌다. 오비이락 격으로 헝가리 부다페스트 다뉴브강 유람선 침몰 사고 때문에 예년처럼 화려한 노래공연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유림복을 입은 사람들이 대거 등장해서 단오제를 올렸는데 그 행사가 대단히 거했다. 지역구는 아니지만 인근 국회의원까지 인사차 등장했고 시의원들도 참석하였다. 시의원들이라야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존재로..
방화수류정과 화홍문 동네보다 철 늦은 방화수류정 영산홍인지라 날씨가 화창한 덕에 꽃을 보러 나갔다. 나뭇가지들을 너무 바짝 잘라서인지 꽃몽우리들이 많이 솟지 않아 꽃들이 그리 탐스럽지 않았다. 아니면 여름과 겨울을 오가는 변덕스런 날씨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오전 시간임에도 시티투어를 이용한 관광객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어 주변 경관에 감탄하고 있었다. 화성의 백미는 역시 용연과 방화수류정이다. 주변 경관도 정리되어 예쁘게 바뀌어가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 화성 정화작업에 따라 더 깨끗하고 아름다워질 것이다. 방화수류정에서 화서문까지 걸어갔다가, 행궁동 골목길을 걸어서, 행궁 앞 무예공연도 한참 보고, 행궁 마당에 벌여놓은 초파일 불교 연등 마당에 가서 동심에 젖어 연꽃도 만들어 보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내친김..
예산군 추사고택 바야흐로 따스한 봄날씨에 봄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꽃놀이 가기 좋은 날이었다. 애석한 것은 구름이 끼어 날씨가 화창하지 않다는 것이었는데, 다행스럽게 미세먼지 농도가 보통 수준이어서, 작심하고 집을 나섰다. 날씨가 좋아서인지 집 밖부터 차들이 밀리기 시작해서, 충청도 시골길까지 한적한 도로를 거의 만나지 못했다. 말끔하게 정돈된 추사고택에 이르러, 추사 기념관부터 들려, 추사의 생애부터 학습했다. 조선말 유명 서예가로 알고 있던 추사 김정희, 기념관 안에서 새로 알게 된 것은 그가 당대의 명문거족의 후손이라는 것이었다. 예산땅에 자리 잡은 것도 영조시대 영의정이었던 김흥경(경주 김씨)의 아들 김한신을 영조대왕이 사위로 맞으면서 비롯되었다. 영조대왕이 애지중지하던 화순공주를 시집보내면서, 이곳 예산 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