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858) 썸네일형 리스트형 봄 꽃 순례 어제 오후 내내 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맑은 날씨에 봄볕이 따습다. 오후 한때 기온이 무려 20도로 치솟았다. 오후 햇살이 좋아 현관문을 열고 나가자 아파트 뜰앞 살구나무 꽃이 만발하여 눈이 부셨다. 집에 되돌아와 카메라를 챙겨 들고 다시 나가 동네 주변을 거닐며 봄꽃 순례길에 나섰다. 살구꽃은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했고, 그제까지 보이지 않던 제비꽃이 양지바른 언덕에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집 뒤 공원의 산수유꽃과 홍매화는 절정기를 맞아 건드리면 원색물이 물감처럼 주루루 흘러내릴 것만 같다. 명자나무는 아직 망울진 모습으로 때를 기다리는 중이고, 양지쪽 목련은 팝콘처럼 터지며 피고 있었다. 길가 개나리는 이제 작은 꽃잎들을 피어내기 시작했다. 동네 뒷산 등산길엔 진달래가 탐스럽게 피어 봄빛을 알렸다. .. 산수유와 홍매화 낮이 길어졌다. 태양의 고도도 높아지고... 한낮엔 벌써 초여름처럼 햇살이 따갑다. 뒷공원엔 산수유가 활짝 꽃을 피웠고 홍매화엔 꽃망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길가의 개나리도 망울져 곧 터질 기세다. 지나는 길에 살며시 다가오는 새봄의 길목이 나도 모르게 주머니속 휴대폰을 꺼내게 했다. 논산 천호산 개태사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을 완성한 곳에 세운 사찰이다. 개태사는 고려의 태조 왕건이 후백제왕 신검으로부터 최후의 항복을 받은 역사적 장소이며, 마침내 후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룬 상징적인 장소이다. 전에 보았던 우주정(개태사 부엌에서 쓰였던 무쇠 가마솥을 보호하는 정자 모양의 집)이 있었는데, 그 사이 천막 비닐로 감싼 철확(가마솥)만 남아있고 우주정은 없어졌다. 대신 대웅보전 앞에 고려 태조 왕건 상소문을 새긴 커다란 기념비가 서 있었다. 이번 방문에는 본래 개태사가 있던 개태사지와 왕건이 신검의 항복을 받았다는 천호산엔 올라가지 않았다. 천호산의 옛 이름은 황산으로 산 아래 연산벌이 바로 삼국시대 신라군과 백제군의 격전지였다. 개태사 아래 연산역 북쪽 깃대봉 아래 황산성터가 남아있다. 황산성 밑 .. 논산 돈암서원 돈암서원은 조선 중기 사계 김장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기호학파의 대표적 서원으로 1634년 (인조 12)에 창건되었다. 서원은 예학의 종장인 사계 김장생 사후에 그의 제자 들과 유림들이 창건되었으며, 조선 중기 이후 우리나라 예학의 산실이 되었다. 현종 원년(1660)에 사액을 받았으며, 고종 8년(1871)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불구하고 명맥을 유지하였다. 2019년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는 돈암서원을 포함한 한국의 서원 9곳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였다. 본디 현위치에 가까운 임리 숲말에 있었는데, 19세기 후반 홍수 피해를 입어 현 위치로 옮겼다. 돈암서원 입구의 표지석 홍살문 산앙루 정면 - 서원의 교류와 유생들의 유식을 위한 누각이다. 산앙루 후면 산앙루 이층 .. 논산 반야산 관촉사 관촉사에 갔을 때마다 비가 왔었다. 그런 연유로 모처럼 맑은 날 일부러 관촉사로 먼 길을 찾아갔다. 관촉사에 도착했을 때 정오쯤이었는데, 관촉사가 북동향이라는 것을 잠시 잊었었나 보다. 일주문에서부터 따가운 남쪽 햇살이 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지독한 역광이었다. 가능한 대로 역광을 피해 측광을 이용하려 애썼지만 대체로 사진들이 어두웠다. 게다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미륵전 뒤 석탑과 석등은 가림막을 쓰고 보수 중이었다. 모처럼 찾아간 곳이 보수 공사를 하게 되면 실망이 여간 큰 게 아니다. 게다가 관촉사 경내 마당은 맨땅이라 얼고 녹기를 반복해서 매우 질척거렸다. 자유롭게 걸어 다니기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건물을 이어주는 마당길에 야자매트를 깔아 불편을 해소하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나라엔 등산.. 화성 융건릉과 정조 효공원 요사이 며칠 동안 그야말로 북풍한설이 극성이다. 어렸을 때 주기적으로 순환되던 삼한사온이 생각난다. 추운 날이면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양지녘 벽에 붙어 햇빛바라기를 하곤 했다. 그 시절 손등은 왜 그리 거미줄처럼 갈라지도 터졌는지. 손 튼 데는 안티푸리민이 특효였지만, 그것도 귀해서 터진 틈으로 피딱지가 엉겨 붙어도 참으며 하릴없이 한 겨울을 넘겼다. 삼한사온이 없어진 지 오래된 오늘, 차가운 북풍이 얼굴에 부딪치니 새봄의 훈풍이 더욱 그립다. 날씨가 추운 탓에 하늘이 푸르렀다. 푸른 하늘 덕에 햇볕이 좋아 모처럼 바깥나들이로 오랜만에 융건릉을 찾았다. 몇 년 사이 주변 풍경이 많이 변했다. 용주사와 왕릉 사이에 있던 푸른 초원에 아파트를 짓는다고 흉하게 함석 울타리를 두르더니, 그 울타리가 없어지고.. 익산 왕궁리 백제 유적지 미륵사지에서 남쪽으로 6km 정도 거리에 왕궁리 유적지. 이곳도 예전에 가보긴 했지만, 그동안 시간이 흘렀으니, 달라졌겠다. 역시 왕궁리 유적지 박물관이 옛날과 다른 모습이었다. 예전엔 왕궁리 유적 전시관이었던 건물이 새로운 모습의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예전에 전시되었던 유물들이야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오늘 본 박물관 안 설비들은 멀티미디어화 되어 있었다. 궁금한 것이 백제 수도가 공주에서 사비로 천도한 것은 역사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익산 천도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터라 박물관 직원에게 직접 문의해 보았다. 직원분의 친절한 설명으로 이해할 수 있었는데, 왕궁리 백제 왕궁은 일종의 행궁이나 별궁으로 이해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궁궐의 징표로 출토된 와당의 파편에 새겨진 글자가 '수부(首府)'.. 익산국립박물관과 복원된 미륵사지 석탑 익산 쌍릉에서 미륵사지로 이동하여 주차장에서 예전과 달라진 모습에 입구를 찾느라 한참이나 헤맸다. 지나는 사람에게 물었으나 그이가 알려준 곳에 입구는 없었다. 혹시나 해서 예전의 박물관에 갔지만, 그곳은 어린이 박물관으로 용도를 바꿔 인터넷 예약 후 관람하도록 운영하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직원에게 물어 왔던 길을 되돌아가 옥상에 잔디를 덮은 기다란 건물 앞으로 갔다. 그곳이 새로 마련한 익산국립박물관이었다. 주차장에 안내도라도 세웠으면 쉽게 찾을 수 있었을 텐데... 박물관에서 기획전시관과 익산 미륵사지와 쌍릉 등에서 발굴된 익산 유적 전시관으로 나누어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새로 지은 건물이어서 전시관은 훌륭했으나, 조도가 너무 낮아 글씨 읽기가 어려웠다. 돋보기를 가져가지 않은 내 불찰이기도 하.. 서동요 주인공으로 믿고 싶은 익산 쌍릉 밤새 눈이 하얗게 내렸다. 하늘이 맑아 밖에 나왔더니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그늘진 곳엔 잔설이 얼어붙어 미끄러웠다. 산에는 오르지 못할 것 같아 익산 쌍릉으로 향했다. 예전에 두어 번 갔었으나, 그 후 발굴작업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그동안 변화된 모습이 궁금했었다. 하얀 눈이 소복히 쌓여 있어서 예전과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 설화 속 동화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인 백제 무왕의 이야기가 새삼 신비롭게 느껴졌다. 흰 눈이 덮인 능을 바라보며 잠시 전설 속의 시간으로 들어가 내 멋대로 상상에 빠져 보았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얼어 두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가다. (善花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卯乙抱遣去如).” 혈기왕성한 백제 청년은 신라의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서라벌로.. 겨울 동학사 모처럼 청명한 날씨였다. 날씨도 제법 푸근해서 동학사를 찾아 걸었다. 동학사 아래 웬 모텔과 펜션, 음식점들이 그리 많은지 깊은 계곡 법당에서 중생들을 구제하실 부처님도 놀라시겠다. 산중 깊은 절을 찾는 것은 아름다운 산수를 벗하며 그윽한 향연 앞에서 부처님 상호를 뵙는 것이 목적일진대, 절 아래에선 세속의 본능들을 굽고 탐하는 난장판이니, 평범한 범생이 중생으로서 불계와 속계의 공존이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다. 더구나 동학사는 신라 충신 박제상을 추모하는 동계사가 있고, 고려말 충신 포은 야은 목은을 추모하는 삼은각과 조선초 삼촌 수양에게 시해당한 단종임금과 그를 위해 목숨 바친 사육신 생육신 등 351 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한데... 시류가 이럴진대 감히 오지랖 펼 처지.. 대전 국립 현충원 오랜만에 들린 대전 현충원, 지난해보다 조금 달라진 모습이었다. 산책 삼아 눈에 익은 현충원 길을 걸었다. 간간히 묘지석 앞에 모여 고인을 기리는 참배객들이 쓸쓸한 겨울 날씨를 대변하고 있었다. 현충탑에 참배한 후, 말도 많고 탓도 많은 독립 유공자 묘역으로 가서 홍범도 장군의 묘를 찾아 묵념으로 고인께 감사함을 올렸다. 그동안 적적했을 장군의 묘 주변에 독립 유공자분들이 빈자리를 메꿔 주셨다. 자신의 삶을 모두 항일투쟁에 바치신 분, 그 숭고한 희생에 머리 숙여 감사드렸다. 해방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던 암울한 시절인 1920년 6월 봉오동과 10월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섬멸한 것은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업적이었다. 일제의 추격을 피해 연해주로 갔던 것이 스탈린의 정책 때문에 머나먼 중앙 아시아 카자흐스탄으.. 화성의 늦가을 바람이 찼다. 비 내린 다음날이라 날씨가 화창하리라 예상했으나, 세고 찬 바람에 하늘은 변화무쌍했다. 어제 비가 덜 내린 모양이다. 스산한 바람에 방문객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모처럼 한산한 화성 풍경이었다. 금년 가을엔 단풍잎들이 제 빛깔을 내지 못하고 시들어 곱은 손가락처럼 쪼그라들어 나무에 붙어 떨어지지 못한 채 말라 간다.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으로 나가 동북각루인 방화수류정까지 성벽을 따라 걸었다. 성벽 아래 희고 눈부신 갈대꽃무리들을 상상했으나, 기운 없는 햇살 탓에 갈꽃의 현실은 빛나지 않았다. 하늘의 색깔도 시선에 따라 달랐다. 대체로 동북쪽 하늘이 맑고 고왔다. 갈숲길을 걸으며 늦가을 한 때를 쓸쓸해 보이는 고성(古城)의 모퉁이에 머물러 있었다. 개인적으로 11월과 12월이 싫다. 낮길이.. 부여 왕릉원과 나성 예전에는 '능산리 고분군'으로 불렸는데,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후 부여 왕릉원으로 명칭이 승격되었나 싶다. 웅진 백제 시대 공산성 밖 송산리에 왕릉을 두었듯, 사비성 동쪽 3km 지점에 방어선인 나성(羅城)을 쌓고 성밖에 왕릉을 모셨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무령왕릉을 발견했었는데, 이곳 능산리에선 왕릉의 주인이 아직 밝혀진 바 없다. 다만 이곳 고분들은 사비시대(538~660)의 백제 왕족묘로 추정할 뿐이다. 부여를 지나는 길에 잠시 들려 옛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예전엔 능산리 고분들과 논 아래 습지에 갈꽃들만 무성했었는데, 그 사이 나성과 능산리 사지(寺址)가 발굴되고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재가 되었으니 세상이 많이도 변하긴 했다. 넓게 잘 만들어진 주차장에 차를 두고, 주차장.. 부여 부소산성의 가을 부여만큼 슬픈 도시가 있을까? 백제는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밀려 한성에서 웅진으로, 63년간의 도읍지 웅진에서 다시 부여로 도읍을 옮기는 등 국력이 쇠할 때마다 쫓겨 다녔다. 종내 122년을 버티던 사비성에서 신라와 연합한 당나라 군대에게 패망한 후, 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당나라까지 끌려가는 치욕을 당했으니 그 비통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을까. 우리 역사의 부끄러움이라 해도 헛된 말은 아니다. 부여는 여러 번 가본 곳이라 그곳의 지리가 눈을 감아도 떠오를 정도로 친숙한 곳이지만 이번 방문은 계룡시와 논산을 경유하여 갔다. 이른바 황산벌을 가로질러 부여로 갔으니 신라군이 백제로 진격할 때 서진했던 방향과 같은 셈이었다. 논산벌은 들이 넓어, 그야말로 천혜의 땅이다. 농사가 주업이었던 옛날에는 그야말.. 옥천 읍내 풍경 우리나라 시인 중 시어의 정제가 가장 뛰어나고 아름다웠다는 정지용 시인이 태어난 곳이 옥천이다. 시 향수의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이 바로 옥천의 옛 풍경이다. 얼룩빼기 황소는 한 때 많은 사람들이 젖소로 오해했으나, 우리나라 토종소인 칡소를 가리키는 말이다. 정지용 시인은 이화 여전 교수로 재직하다가 6 25 전쟁 때 납북되어 어떻게 죽었는지 그 종적을 알 수 없다. 한국전전쟁이 예술계에 끼친 비극이다. 아름다운 예술도 정치적 억압 아래에서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는 나약한 존재가 되고 만다. 아름다운 그의 언어들도 88 올림픽 이후 냉전시대가 끝나면서 해금되어, 세상 밖으로 다시 나와 햇볕을 볼 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 옥천 부소담악 추소정 부소담악은 대청댐을 건설하면서 마을이 수몰되고 댐 위에 있는 많은 야산들도 물에 잠기게 되면서 생겨난 곳이다. 이곳은 기암절벽의 700여 m 산줄기가 물에 잠겨 산봉우리 능선들이 호수 위에 떠서 뱀처럼 길게 뻗은 형상이다. 그 모양이 연꽃이 연못에 떠 있고 호수에 바위가 있는 곳이라 하여 부소담악(芙沼潭岳)이라 한다. 한국관광공사에서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주말 여행지로 선정했다고 한다. 유튜브에서 이곳을 검색해보니, 대부분 드론으로 촬영을 한 것들이라 일반 방문자로서는 볼 수 없는 풍경들이어서 방문이 망설여지기도 했으나, 풍광이 아름답다고 하여 불원천리 머다 않고 찾아 나섰다. 산길이 험하기로 유명한 지역이라 옥천 IC부터는 거북이 운행으로 굽이굽이 돌아 황룡사 주차장까지 갔으나, 평일임에도 방문객들이 몰.. 가을 세종 호수 공원 가을빛이 그저 고운 날이었다. 햇빛 따라 호수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노랗게 또는 빨갛게 변해가는 나뭇잎들이 햇볕아래 빛나고 있었다. 가장 아름다운 계절답다. 점점 짧아지는 낮길이 때문에 서러워지기도 하지만, 동지가 지나면, 또 새봄이 다가서니 감상에만 빠질 이유는 없다. 내게 주어진 아름다운 오늘 하루가 빛날 뿐이다. 멀리 구름 아래로 계룡산 능선들이 아득히 가물거리고 있었다. 불심처럼 그윽한 영평사 구절초 영평사의 구절초 축제는 끝났지만 구절초들은 막바지인지도 모를 작은 꽃들을 올망졸망 피워내고 있었다. 절정기가 지난 탓 때문인지 영평사 뒷동산에는 이 빠진 듯 구절초들이 성근 곳도 많았지만, 익어가는 가을 속에 부처님의 불심처럼 곱게 피어나고 있었다. 구절초를 심어 꽃동산을 만든 이곳 스님들의 노력으로 영평사는 가을 구절초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리 크지 않은 사찰임에도 변화무쌍 변모하는 영평사에는 스님들의 혁신 정신이 그 동력의 원천이 되는 듯하다. 구절초 동산 외에도 추모공원을 만들고, 많은 장독들에 전통 장류들을 숙성시키는 등, 상업적으로도 재정확충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한 순간 지나가는 과객으로서 자세한 내용이야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절 주변의 조경만 보더라도 이곳 스님들의 노력은 기.. 계룡산 신원사와 중악단 천도재 갑사에서 가까운 신원사를 찾았다. 신원사는 규모는 크지 않으나 소박하고 단아하며 깔끔한 절이다. 동학사와 갑사, 신원사가 계룡산의 대표적인 고찰인데 내 보기에는 그중 신원사가 제일 단아하며 자유분방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절이다. 백제 말 의자왕 때 창건한 절로 역사가 깊다. 예전에 계룡산 골짜기에 우후죽순처럼 많았던 무속신당들을 철거하자 계룡산 주변으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일부 무속인들이 옮겨 간 곳이 신원사 주변이다. 계룡산 정상인 천왕봉과 가장 가깝기도 하거니와 산에서 뿜는 기운이 가장 강한 곳이 신원사가 아닐까 나름 짐작해 본다. 계룡산 서남쪽에 자리한 신원사는 조선시대 중악단을 두고 산신께 제사 지냈다. 조선조 때 묘향산에 상악단을, 지리산에는 하악단을 세워 국가에서 산신께 제사를 지냈다. 지금은 .. 계룡갑사의 가을 기상하여 커튼을 제치자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나타났다. 완연한 가을이다. 기온도 뚝 떨어져 아침 온도가 10도 안팎이다. 간단한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계룡산이 가까워지면서 닭볏 같은 기묘한 산봉우리들이 눈앞에 전개되었다. 언제 보아도 참으로 신묘한 형상이다. 제법 눈에 익은 갑사 가는 길이었음에도 주차장 근처에서 내비게이션이 심술을 부렸다. 좁은 편도 일 차선에서 엉뚱한 길로 안내하는 탓에 잘못 들어섰음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앞으로 가야 했다. 펜션들이 즐비한 마을의 좁은 길을 돌고 돌아 주차장에 들어섰다. 어젯밤까지 내린 보슬비 때문에 갑사로 가는 길 위에 젖은 낙엽들이 쌓여 있었다. 송풍기로 낙엽들을 날리는 굉음과 휘발유 타는 냄새가 요란했다. 시간을 두고 조금만 참으면 저절로 말라서 .. 여주 남한강 영월루(迎月樓) 영월루는 신륵사에서 여주대교를 건너자마자 만날 수 있는 커다란 누각으로 남한강을 굽어보고 있어 누각 위에서 바라보는 남한강 풍경이 그윽하다. 신륵사 방향에서 봐도 벼랑 위 숲 사이에 우뚝 솟은 그림 같은 누각이 남한강의 운치를 한층 더 북돋운다. 여주박물관 신관 카페에 앉아 차 한 잔을 마시며, 카페 안 인공수조에 비친 영월루 풍경은 선경에 가깝다. 이름 그대로라면 달맞이하는 누대인데, 달이 더오른 달밤에 맞이하는 풍경은 더욱 운치 있을 것 같다. 남한강을 따라 오르내리는 황포돛배는 마치 과거로 거슬러 가는 착각을 느낄 만큼 한적하고 여유롭다. 여주 봉미산 신륵사와 강월헌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신륵사였다. 평일 오후여서인지 신륵사엔 주변부터 한산했다. 점심시간이 훨씬 지났기 때문인지 식당을 찾아들었으나, 주인이 없었다. 하는 수없이 편의점에서 간식거리로 요기하고 신륵사 경내로 들어갔다. 전에는 입장료를 받았는데, 매표소가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매표 없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이곳 신륵사에도 징수하던 관람료가 없어진 것을 알았다. 신륵사는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과 썩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고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내에 들어가서 두 번 실망했다. 첫 번째는 가람막을 씌우고 범종각일대를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신륵사 좌측면 바위 위 강월헌 정자 주변에 추락 위험이라 적은 현수막과 정자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도록 어설프게 둘러친 금줄 때문이었.. 여주 영릉(寧陵) 효종대왕릉 세종대왕 英陵에서 옆 숲길을 따라 효종대왕의 寧陵으로 걸어갔다. 이른바 왕의 숲길이었다. 700여 m 거리의 숲길은 우람한 적송들이 우거진 가운데, 인적조차 없어 고요하고 정감이 있어 운치가 있었다. 효종은 인조 4년(1626), 8살에 봉림대군(鳳林大君)으로 봉해졌다. 병자호란에 조선이 항복한 탓에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었다. 인조 23년(1645) 5월, 귀국한 후, 1개월 만에 형인 소현세자가 급사하자 그의 뒤를 이어 세자로 책봉되었고, 4년 후 인조 27년(1649)에 아버지 인조가 승하하면서, 창덕궁 인정전에서 조선 17대 왕으로 즉위했다. 효종은 청나라를 정벌하여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자는 북벌론을 주창하며, 조선 중흥의 기틀을 다졌으나, 39세로 재위 10년 만에 아깝게 생.. 여주 영릉(英陵)-세종대왕릉 모처럼 전철을 타고 영릉에 갔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니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도착지에서 다음 장소로 이어지는 교통 연결이 원활하지 못했다. 여주 세종대왕릉역까지는 전철로 수월하게 갔지만, 전철역에서 영릉까지 이어지는 시내버스 배차시간이 일정하지 않았다. 명색이 세종대왕릉역이건만 세종대왕릉까지 이어지는 버스를 40분 이상 기다려야하는 현실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공교롭게 간격이 뜸한 시간에 도착한 탓에 역사 주변에서 40여분을 기다렸다. 차라리 걸어가는 것이 나을 성싶어 안내소에서 이것저것 물었으나 신통한 정보는 없었다. 전철역에서 허무하게 40여분을 기다려 5km 정도 거리에 있는 영릉행 버스를 타게 되었다. 영릉에 도착하자 수년 전 공사 때문에 영릉 주차장에서 되돌아갔던 생각이 .. 정자가 있는 가을 풍경 가을빛이 완연하다. 불볕더위로 땀 흘리던 날이 엊그제인데, 벌써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차다. 나뭇잎 색깔도 점점 빨갛게 물들어 가을의 흥취를 돋우고 있다. 모처럼 숲 사이를 한적하게 걷고 있는데, 느닷없이 전투기 굉음이 가을 하늘을 찢었다. 깜짝 놀라 하늘을 보니 F-15 편대와 공중 조기경보통제기가 북서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시절이 하수상하다. 푸틴이 일으킨 우크라이나 전쟁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데,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티나인 무장단체가 공격을 하며 민간인들을 살상하고 인질로 잡았단다. 아름다운 이 가을날에 문득 전쟁의 공포가 머리를 스친다. 우리나라에서 6 25 같은 참혹한 전쟁이 다시 일어나면 안 될 텐데, 국제정세가 날로 어지러우니 그 불똥이 우리 발등 위에 떨어질까 염려스럽다. 도봉산 신선대 지난밤에 궂은비가 내린 탓으로 화창한 가을날이었다. 밀린 숙제 풀듯 눈에 아른거리던 도봉산을 향해 작심하고 떠났다. 늦게 출발한 탓에 도봉산 아래 도착한 시간이 12시였다. 등산로 입구로 들어서자 벌써 내려오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일찍 출발했어야 했을 것을... 길지 않은 산행길이긴 하지만 해가 짧아져 벌써 6시쯤에 해가 진다. 날씨는 가을답게 다행히 20도 내외라 산행날씨론 적격이었다. 탐방센터에 이르기까지 길가에 무수한 음식점들과 등산복 가게들이 즐비했다. 사람도 많고 상점도 많았다. 도로 따라 전선줄도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 살 만큼 되었으면 뒤엉킨 전선들을 정리했으면 좋겠다. 명색이 국립공원인데 탐방로 주변이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었다. 등산로 입구부터 안내표지도 제대로 된 것이 없어 주변 .. 경복궁과 중국산 대여 한복의 한계 가을날답지 않게 연일 비가 내리더니 모처럼 비가 그쳤다.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카메라를 챙겨 경복궁에 들렀다. 월대 공사로 광화문 출입이 막혀있어서 경복궁 서편 고궁박물관 출입문으로 들어갔다. 평일임에도 관람객들이 붐볐다. 내국인보다 외국인들이 더 많아 보였다. 대부분 한복을 입고 기념사진 찍기에 분주했다. 한복도 한류 탓인가 보다. 궁궐 안이 한복 입은 사람들로 넘쳐 났다. 한복 입은 사람들이 넘쳐나는 것은 좋은 일이긴 하나, 변형된 여성 한복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치마폭을 넓히고 통치마 안에 둥근 테를 넣어 부풀린 것은 우리 고유의 한복 치마가 아니다. 한복치마는 통치마가 아니라 평면으로 된 차마를 허리에 감아 입는 것이다. 대여 한복의 대부분은 통치마로 보인다. 한복 치마에 서양식 맵시를 부.. 치욕의 역사가 서려 있는 남한산성 권력욕에 눈 먼 서인세력들이 쿠데타로 실리적 외교를 추구하던 광해군을 축출하고 능양군이던 인조가 즉위하면서 조선 왕조는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명분을 주장하며 오직 대명(大明)만을 사대하는 정책으로 몰아갔기에 두 번의 여진족의 침략을 받아 왕은 왕대로 치욕스러운 항복을 했으며, 백성들은 전란의 고통에 빠져 많은 사람들이 살육당하거나 삭풍이 부는 오랑캐 나라로 끌려갔다. 반정 후 논공행상을 빌미로 북방을 지키던 이괄이 난을 일으켜 훈련된 군사들을 잃은 것도 원인 중 하나라고 하지만, 이괄의 쿠데타로 공주까지 도망간 인조로서 국방을 강화하기보다는 장수들을 견제하는데 힘써, 나라를 지키는 군사력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었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난리가 나면 임금이 도망하는 것이 우리나라 지도자의 유.. 이전 1 2 3 4 ··· 3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