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해외여행

(135)
부다페스트 전날부터 질척거리며 내리던 겨울비는 끊임없이 온종일 내렸다. 프라하에서 헝가리 부다페스트까지 약 5시간을 달려 비를 맞으며 한 밤중에 호텔에 도착했다. 장거리 여행이라 너무 피곤해서 눕자마자 잠에 곯아떨어졌다가 새벽 2시경에 깨었다. 한국시간으로 오전 10시쯤 일터... 우리나라라면 벌써 퇴역한 지 오래되었을 리모컨도 없는 14인치 한국산 대우 TV를 손가락으로 터치하며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 보았으나, 별 재미가 없어 이내 심드렁해지고 말았다. 옛날 북방에서 중국을 괴롭히던 흉노족이 중국의 등쌀에 유럽으로 쫓겨 세운 나라가 헝가리라는 것과 신라의 경주 김씨가 흉노의 자손이라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어온 터라 근거가 박약하여 정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흉노족이 훈(Hun)족이라 믿고 싶을 만큼 친숙하게 느껴진..
프라하 어둠 속 버스는 베를린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에서 블타바 강을 따라 네 시간여를 달려 밤 9시 30분에 체코의 프라하에 도착했다. 강변에 버스를 주차하고 다리를 건너 구시가 광장으로 이동했다. 다리 위에서 바라본 강언덕 위 프라하성이 황금색 조명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구시가 광장으로 이동했는데, 광장에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려 많은 인파들로 북적거렸다. 춥고 밤늦은 시간임에도 사람들은 노점에서 자잘한 먹거리를 사 먹기도 하고, 와인을 뜨겁게 데운 핫와인을 마시며 겨울밤을 맞고 있었다. 밤이 깊고 날씨가 쌀쌀했으나, 조명에 빛나는 황금색 야경과 이국정취에 취해서 힘든 줄도 모르고 가이드를 따라다녔다. 특히 광장에 열린 휘황찬란한 크리스마스 마켓은 처음 보는 광경이어서 호기..
베를린 이젠 평화의 도시가 된 베를린. 히틀러의 선동에 놀아난 독일 국민들의 맹목적인 추종이 결국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종내는 인류에게 엄청난 재앙을 불러왔다. 독일 백성들의 멍청한 선택이 불러온 엄청난 파멸이었다. 좋은 정치인을 두는 것은 국민들이 똑똑하기 때문이다. 극우로 치닫는 자민당을 추종해서 동아시아에 갈등을 부추기는 아베가 설치는 것도 일본인들의 선택의 결과이다. 정치가 혼탁한 것은 국민들이 어리석어서이다. 패전으로 분단된 독일이 어느 날 아침 갑자기 통일되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하루아침에 통일된 독일은 한국인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포르투갈 파티마 성모 발현 성지에 전시된 베를린 장벽 조각을 보며, 우리에게 돌아올 통일이 독일에서 일어난 것 같아 가슴 아팠었는데... 통일된 지 25..
마드리드 여행의 마지막 날, 톨레도 관광 후 마드리드로 돌아와 버스를 타고 이동하며 시내투어를 했다. 역시 중세풍으로 고전미 넘치는 건물들이 도시의 품격을 보여주고 있었다. 프라도 미술관에 들려 유명화가들의 그림들을 관람했는데, 그 크기와 규모가 파리 루브르를 압도하는 듯했다. 루브르와 달리 실내 촬영을 금지해서 인상적인 그림들을 마음속에 담아두는 수밖에 없었다. 굶주렸던 사람이 갑자기 산해진미를 먹으면 체한다고, 평소 보지 못하던 대작들을 한꺼번에 받아들이자니, 내 지식이 부족한 탓으로 그게 그거처럼 보였다. 발바닥이 아프도록 이리저리 다니면서 그림들을 보았지만 크게 기억되는 것이 없다. 긴 여행에 피로했는지 잇몸이 부어올랐다. 장거리를 옮겨 다니며 급히 먹는 식사 때마다 칫솔질을 잘못했나 보았다. 치통까지 겹..
중세 성곽 도시 톨레도 돈키호테의 배경이었던 콘수에그라 풍차언덕을 지나 톨레도로 이동했는데 가이드에 의하면 이 도시야말로 최고의 경관을 갖춘 도시라고 한다.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톨레도로 들어가는데 길목부터 풍경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차창밖으로 보이는 성곽과 성당, 유유히 흐르는 강물 위의 다리까지 탄성 없이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톨레도 시를 한눈에 조망하는 전망대에서 그야말로 놀랍고도 아름다운 중세도시를 볼 수 있었다. 굽어 흐르는 강 언덕에 세운 이 도시는 로마시대 유적과, 이슬람 문화, 그 위에 가톨릭 문화, 그 바탕에 현대문명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어여쁜 전통도시였다. 톨레도는 수도 마드리드 남서쪽 타호 강 연안에 있는 도시로 역사·미술적으로는 마드리드를 능가하기도 한다. BC 2세기에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고 8∼11..
콘수에그라 마드리드에서 하룻밤을 묵고 세르반데스의 돈키호테 무대였다는 콘수에그라로 이동했다. 어린 시절 돈키호테를 읽으며 그 무대뽀 정신에 실소하던 생각이 났다. 돈키호테는 생각 없이 행동하는 전형적 인물로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며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짝 지워져 후세까지 길이 전해질 것이다. 차창밖으로 풍차 언덕이 보이는데, 가이드가 인근 휴게소에 차를 세우더니, 도로 옆 밀밭에서 멀리 있는 언덕 위 풍차들을 구경하며 사진을 찍으란다. 작은 야산 위의 볼품없는 풍차들이라는 얘기를 미리 듣긴 했지만, 여기서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기만 했다. 어쩔 수 없이 밀밭에 들어가 멀리 있는 풍차 언덕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승용차들이 풍차가 있는 언덕 위로 올라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승용차뿐만..
살라망카와 세고비아 포루투갈 파티마에서 출발하여 다시 스페인의 살라망카를 경유하여 마드리드로 가는 일정이다. 길게 느껴졌던 스페인 여정도 이제는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빡빡한 스케쥴에 장거리를 이동하는 강행군으로 지쳐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지만, 한편으로 가는 곳마다의 경치들이 모두 신세계였기 때문에 아쉬움도 있었다. 살로망카는 마드리드 북서쪽에 있는 대학촌을 중심으로 발전한 도시이다. 한니발의 점령 이래, 로마의 군사도시였으나, 고트와 이슬람의 지배를 거쳐 1085년 스페인 영토로 회복되었다. 13세기에 알폰소 대주교에 의해서 살라망카대학이 창립된 이래 학술 ·문화의 중심지로서 발전하였다. 1218년을 기준으로 살라망카 대학교는 유럽에서 세 번째로 오랜 역사를 가졌다. 또 1254년 알폰소 10세에 의해 Un..
포루투갈 꾸물꾸물하던 날씨는 기어코 비를 뿌렸다. 겨울이 우기라고는 하나 그동안 큰 비를 만나지 않아 다행이다 싶었는데 리스본으로 들어가는 길목부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르셀로나에서도 비 때문에 시내 관광이 어려웠었는데... 비올 때 제일 큰 애로점이 카메라가 젖는다는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를 닮았다는 거대한 현수교를 건너 리스본에 들어갔다. 교량 아래는 바다 같은 떼주강이 흐르고 있었다. 한강만큼이나 넓은 강은 바다로 이어져 크고 작은 배들이 리스본까지 입항을 할 수 있는 천혜적 조건을 갖추어 리스본이 해양대국의 진출기지 역할을 다할 수 있었다. 포르투갈 왕국은 1143년에 세워졌다. 15~16세기 해양왕국 지위를 확립하면서 세계 최대의 영토를 소유했지만 18세기 중반 나폴레옹의 침입, 브라..
세비아 모로코로부터 건너온 타리파항에서 세비아로 가는 일정이었다. 세비아는 과달키비르 강어귀에 있는 내륙의 항구도시이다. 이곳은 문화 중심지로서, 이슬람 세력이 스페인을 지배했을 때 수도였으며, 스페인이 이곳을 탈환한 뒤 신세계를 탐험할 때 그 중심지이기도 했다. 이곳은 로마 지배 당시에 히스팔리스로 불렸으며 서(西)고트족의 중심지였다가 711년에 이슬람 무어인들에게 점령당했다. 아바스 왕조 및 그후의 알모라비드와 알모아드 동맹의 지배를 받던 당시의 문화 중심지였다. 1248년 페르난도 3세가 이끄는 스페인 그리스도교도들에 의해 이슬람교도들이 쫓겨난 뒤 이 도시는 대륙탐험의 중심지가 되었고,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으로 새로운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1503년 카사데콘트라타시온(무역관)의 설립과 함께 아메리카 대륙..
모로코 아프리카 북단의 모로코 역시 광활한 땅을 가진 나라였다. 과거 800년간 스페인을 점령하여 이슬람 문화의 융성을 이루었던 그들은 아프리카로 쫓겨온 후, 근세에 이르러 프랑스와 스페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1956년 독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인구 3000여만에 GDP 3000불 정도의 빈국에 머무르고 있다. 넓은 들과 비옥한 토지, 풍족한 농산물 등, 모든 것이 넉넉한 98% 이상의 이슬람 국가지만, 거리에는 궁기가 흘러 서민들의 삶은 그리 넉넉해 보이지 않았다. 탕헤르에서 카사블랑카의 여정도 그리 쉽지는 않았다. 해협을 건너기도 했지만, 작은 도시들과 평원지대를 지나고 지나서 어둠이 내려앉은 뒤에야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모로코 원주민인 베르베르 사람들의 고대사는 분명하지 않다. 페니키아인과 ..
지브롤터 해협 말라가에서 모처럼 여유 있는 아침 식사를 했다. 아침에 돌아볼 미하스를 어젯밤 미리 본 탓도 있었지만,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는 페리 시간에 맞추어야 하기 때문에 9시 10분에 호텔을 떠나 지브롤터 반도가 보이는 알제시라스 항에서 이른 점심을 먹었다.(시간적 여유가 넉넉한데도 왜 밤중에 미하스를 들렸는지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다. 더구나 미하스는 말라가에서 타리파로 가면서 경유할 수 있는 곳인데, 어제저녁 미하스까지 왜 내려갔다가 올라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해협을 건너기 위해 스페인 최남단의 타리파 항으로 갔다. 타리파항에서 EU 출국신고를 하고 고속 페리를 타고 한 시간여를 항해하여 북아프리카 모로코의 탕헤르 항에 도착했다. 모로코는 스페인보다 1시간 빨랐다. 우리나라와는 7시간의 시차가 나는 셈이..
말라가 말라가로 가는 도중 미하스에 들렸다. 원래 다음날 아침에 들릴 예정이었으나 가이드가 스케줄을 당겨 진행하였다. 그 덕에 아침 햇살에 하얗게 빛나는 언덕 위의 집들을 어둠 속에서 바라봐야 했다. 언제 다시 이곳을 방문할 수 있을까. 한 번 스쳐 지나가면 그만인 것을...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한때 우리나라 사람으로 세계 최초 팝페라 가수가 되었다는 키메라가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녀 약력에 1000년 전 왕족의 후손이라는 글 구절에 놀랐었는데, 그녀의 본관이 경주라는 것이었다. 중동의 부호였던 남편의 배려로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렸었던 것 같은데, 그녀가 우리나라에 와서 트로트 공연을 하는 것을 보고 퍽이나 실망했었다. 음악에 대해 문외한이지만 그녀의 음악성이 그리 뛰어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론다 코르도바를 떠난 버스는 투우의 발상지인 론다를 거쳐 지중해의 대표적 휴양도시 말라가까지 간다. 점심 후 식곤증으로 졸다 깨다를 반복하며 론다에 이르렀다. 론다는 주도 말라가에서 북서쪽으로 113km에 위치하며 평균 고도는 723m이다. 기원전 6세기경 켈트족이 최초로 이 지역에 아룬다(Arunda)라는 이름의 정착촌을 세웠고, 이후 고대 페니키아 인이 제법 큰 규모의 마을을 세웠다고 한다. 현재 도시의 시초는 기원전 3세기에 로마 제국의 장군이자 정치가인 아프리카누스(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가 건설한 요새화 된 마을이다. 기원전 1세기에는 로마 황제로부터 시의 칭호를 얻었다. 오랜 옛날부터 에스파냐 남부의 주요 도시였으며 현재도 말라가주를 구성하는 세라니아데론다 지..
코르도바 그라나다 호텔에서 모처럼 와이파이를 통해서 한국 소식을 접했다. 사람 사는 세상임에도 너무나 다른 환경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오늘의 일정은 이슬람 마지막 보루였던 그라나다를 떠나, 그들의 본거지였던 코르도바를 찾아가는 길이다. 코르도바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 중앙부, 과달키비르 강이 흐르는 도시로, 8세기 초 무어인으로 불리며 북아프리카를 건너 원정 나온, 이슬람 세력에게 정복되어 756년에 우마이야 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8~10세기가 황금시대로, 이슬람 세계의 학문과 예술 중심지로 발전하다가, 1236년 그리스도 교도에 의해 그라나다로 쫓겨감으로써 이슬람 문화의 융성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슬람 정복 당시 라흐만 1세(Abd al-Rah-man 1세, 재위 756~788)가 785년경 ..
그라나다 알람브라 궁전 발렌시아 론다 호텔에서 하룻밤 숙박 후, 동이 틀 무렵 서둘러 출발하여 그라나다에 있는 알람브라 궁을 향했다. 차창으로 스치는 발렌시아 시가의 조형물, 거리의 조형물 하나하나가 예사롭지가 않았다. 시가를 벗어나, 버스는 광활한 대지를 달리고 달렸다. 중간에 들렸던 휴게소, 하늘은 푸르고 맑았다. 먼지 하나 섞이지 않은 청정한 공기 덕분에 원색이 가득한 스페인을 호흡할 수 있었다. 어찌나 맑고 깨끗한지 가시거리는 무한대였다. 휴게소 옆의 호텔 건물 외벽이 흥미롭다. 원색만을 고집해서 타일을 붙이듯 원색으로만 색칠한 모습이 예사로워 보이지 않았다. 언덕 위에 얌전하게 올라앉은 주택도 아름답고... 버스는 내륙 깊숙이 고원지대에 올랐다. 터키의 파묵칼레처럼 흰 눈이 덮인듯한 석회암 지대도 지나고... 과수원과..
바르셀로나 내가 알고 있던 스페인은 세르반데스가 있었고, 메시가 있으며, FIFA 랭킹 1위이고, 경제 사정이 나빠 시위가 많은 나라로 국민소득이 우리나라와 비슷하거나 낮을 거란 정도였다. 전에 가보았던 로마가 보고 싶어 이탈리아로 가려다가, 스페인으로 목적지를 바꾸었다. 별생각 없이 방문했던 스페인에서 받은 문화적 충격은 상당히 컸다. 그곳에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었고, 지중해의 작렬하는 햇빛 속에 정열이 꿈틀거렸으며, 광활한 토지에 원색의 빛깔이 눈부신 곳이었다. 사는 형편은 어떨지 몰라도, 낭만이 느껴졌다. 우기라는 겨울철임에도 푸른 하늘과 빛나는 햇살이 따사로워, 사시사철 미세먼지에 시달리는 우리와 달리, 맑고 깨끗한 자연 속에 인생을 즐길 수 있어 여유가 넘치는 곳이었다. 스페인에 가기 위해 핀란드 ..
보스 포러스 해협 아침 6시 10분에 3층에서 식사를 하고, 호텔방으로 돌아갔으나, 방을 찾을 수 없었다. 카드키 껍데기를 방에 두고 알맹이만 가져온 탓에 방 번호를 몰라 내방을 찾아갈 수가 없었다. 당연히 카드키에 방 번호가 씌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문제였다. 그 문이 그 방문, 모두 똑같이 생긴 방문에 방향감각까지 잊어버려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세월 따라, 머리가 점점 굳어가는가 보다. 식당으로 다시 내려가 가이드를 만나 방호수를 확인하고, 방문을 열려했으나, 이번에는 카드키가 말썽이었다. 1층 안내데스크에 가서 사정을 얘기하니 카드를 기계에 꽂고 키보드로 입력 후 됐다고 했는데 그 역시 먹통이었다. 그렇게 두세 번을 오르내리다가 지배인과 함께 올라가 겨우 방문을 열었다. 아침 먹고 오르내리다 아까운 시간을 다 ..
이스탄불의 밤 트로이를 마지막으로 이번 여정이 끝이었다. 그 길고 멀었던 28,000km의 행군도 끝나는 것이다. 이제 다시 열몇 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아부다비를 거쳐 돌아가야 한다. 이스탄불의 마지막 밤을, 가장 번화하다는 탁심 거리에서 한식으로 저녁식사를 했다. 오이김치, 깍두기, 닭볶음탕, 그리고 배추국과, 흰밥이 메뉴였다. 불과 며칠 만에 맛보는 한식이었건만 매콤한 낙지볶음이 추가되자 탄성을 질렀다. 반찬류야 우리나라보다 못했지만, 에페소에서 먹었던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날이 저물어 탁심 거리 관광을 나섰다. 갑자기 밤이 되자 기온이 뚝 떨어져 돌아다니는 동안 오들오들 떨었다. 배낭이 실려 있는 버스는 멀리 있고 대책 없었다. 너무 추우니까 관광이고 뭐고 만사가 귀찮아졌다. 설상가상으로 함께 갔던 동료는 ..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다 터키 여정도 이제 끝나가고 있었다. 트로이로부터 이스탄불까지는 대략 5시간 소요되는데, 차나칼레에서 다르다넬스 해협을 카페리로 50여분 건너간다. 이 해협에서 1차 세계대전 때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 터키 겔리볼루 반도에 상륙 작전을 벌렸는데 그것이 유명한 갈리폴리 전투이다. 1차세계대전 2년 차인 1915년 초에 독일은 오스만 터키에 막대한 경제원조를 제시하여 주축국으로 가담하게 하였다. 터키의 참전으로 러시아가 영국 프랑스로부터 보급로를 차단당하게 되자, 영국은 터키의 다르다넬스 해협을 제압하여 지중해와 흑해를 잇는 보급로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당시 영국은 독일과 대치하고 있는 북해에서 사용할 수 없는 구형 전함들을 해군력이 취약한 터키 전선에 투입하였다. 또한, 아라비아에서 활동 중인 로렌스의 와해 ..
트로이 지중해 연안도시 아이발릭의 밤은 쓸쓸했다. 호텔에서 저녁을 먹은 뒤 지중해 바닷가로 나가 잠시 걸었다. 어둠이 짙게 내린 해안에는 철 지난 파라솔들만 접힌 채로 서서 바람소리에 잉잉 우는 소리를 내었다. 급격히 떨어진 기온과 차가운 바람에 옷깃을 여몄으나 춥기는 마찬가지였다. 가이드가 추천해준 양갈비 집을 찾아가니, 벌써 우리 일행의 다른 팀들이 맥주를 즐기고 있었다. 한 자리 끼어들어 10불짜리 양갈비와 맥주 두 병을 시켜 그들과 담소하며 먹고 마셨다. 잔뜩이나 기대했던 양갈비는 기대 이하였다. 고기 냄새를 맡고 서성이는 많은 고양이들과 개들에게 갈비뼈를 던져주었다. 고양이와 개들은 익숙한듯 냉큼냉큼 잘 받아먹었다. 그렇게 길들여진 탓에 낯선 사람들에게 적대감을 절대 드러내지 않는 이 동물들의 정체성이..
에페소 파묵칼레 히에라 폴리스를 떠나 에페소로 가는 도중 흐렸던 하늘이 활짝 개었다. 에페소까지 대략 3 시간여 걸렸다. 에페소에서 한식당에 들려 비빔밥으로 점심을 먹었는데, 기름장이 참기름 아닌 올리브유였다. 뭐 꿩 대신 닭이라고 이빨이 없으면 잇몸으로 씹으라 했다. 밀려드는 손님들은 모두 한국 손님뿐, 가족들로 운영하는 듯한 이 식당은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손님들 치다꺼리에 정신없었다. 우리 일행 중 한 사람이 비빔밥 위에 얹어주는 계란 프라이가 없다고 말을 하자, 정색을 하며 계란 프라이 만들다간 하루 종일 부쳐도 감당할 수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 이른바 독점의 배짱이라 생각하니 쓴웃음이 나왔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고생하며 장사하는 것이 안쓰럽긴 하지만, 계란 하나 부쳐줄 정성이 없다면 서비스 정신은..
히에라 폴리스-파묵칼레 전날 저녁 숙소로 가는 버스 안에서 차창밖으로 파묵칼레(터키의 의미로 '목화의 성')이라고 불리는 흰 석회 종유석 언덕을 보았다. 조명등에 하얗게 빛나던 종유석 언덕이 아름답게 보였다. 아침식사 후 숙소에서 떠나 10여분 거리에 있는 종유석 언덕 위에 있었다는 고대도시 히에라 폴리스를 찾았다. 하얀 석회석 벼랑 아래 작은 마을과 연못이 있었는데 우리는 마을을 지나 벼랑을 돌아서 언덕 위로 올라갔다. 언덕 위가 고대도시 히에라 폴리스로 이곳에는 아폴론 신전을 비롯해 원형극장, 공동묘지, 목욕탕 등의 유적이 남아있다. 온천지로 유명하여 크레오파트라까지 이곳을 찾았고, 유럽지역에서 병을 치유하고자 많은 환자들이 방문하기도 했다고 한다. 종유석 언덕 위 로마시대의 고대도시는 지금도 계속 발굴을 진행하고 있으며,..
카파도키아에서 파묵칼레까지 노정 쾌적한 카파도키아 호텔에서 모처럼 여유 있는 시간을 보냈다. 저녁 식사 후 일행들의 대부분은 벨리댄스 관람을 가고, 아침 식사 때는 열기구 투어를 떠나서 남아있는 사람은 모처럼 제 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느긋하게 일어나 6 층 호텔의 창문 커튼을 젖히니, 아침 햇살 속에 풍선이 날아오르듯 열기구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잠시 창 밖 풍경에 취하다가 식당에 내려가 8시에 아침을 먹었는데, 그동안 터키 투어에서 일찍 먹던 습관이 몸에 밴 탓인지 우리가 선착이었다. 9시에 기구 투어 갔던 일행들을 만나 카파도키아를 떠났다. 왔던 길을 되돌아 전날 점심을 먹었던 우치 히사르 인근의 상점에 들렸다가, 산업도시인 Konya를 거쳐 장장 9시간을 버스를 타고 달려 어둠이 내린 파묵칼레 리조트에 도착했다. 식사 후 리..
괴레메 계곡-카파도키아 우치 히사르를 오른편에 두고 작은 언덕을 돌아나가자 광활한 대지에 움푹 꺼진 큰 골짜기가 나타났다. 골짜기 사이에 풍화된 무수한 바위들이 솟아 있었는데, 그 장대함은 이루 비할 데 없었다. 내 비록 너른 세상을 두루 섭렵하진 못했으나 이렇게 기묘하고 아름다운 자연은 아직 보지 못했었다. 금강산 일만 이천 봉, 천하의 명산인 황산보다도 대만의 해양공원 야류의 버섯돌들도 이보다 감동을 주진 못했다. 한 눈으로 보는 괴레메 계곡 전경 지나온 우치 히사르 뒷모습 괴레메 좌측으로부터 1 괴레메 좌측으로부터 2 괴레메 좌측으로부터 3 괴레메 좌측으로부터 4, 우측 끝 지점까지 자리를 옮겨서 70mm 줌 24mm 버스로 잠깐 이동 중 차창 밖 풍경,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른바 스머프 마을이라는 버섯 바위,..
우치 히사르-카파도키아 데린쿠우에서 나와 점심을 먹고 가까운 거리에 있는 우치 히사르로 갔다. 우치 히사르는 날카로운 바위라는 의미로 거대한 바위 하나에 입구를 뚫어서 집의 형태를 이루었다. 이 모양이 비둘기 집과 비슷하다고 해서 비둘기집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단다. 바위 꼭대기에는 빨간색의 터키 국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가는 곳마다 초승달과 별이 그려진 빨간 터키 국기가 날리고 있었다. 렌즈를 광각으로 바꾸어 모래 언덕에 올라가 멀리 전경을 찍었다. 우치 히사르 전경 후경
지하도시 데린쿠우-카파도키아 으 흘라라 협곡으로부터 40여분 달려 지하도시인 데린쿠우에 도착했다. 데린쿠우는 초기 크리스트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살던 지하 동굴 도시로서 안쪽에는 부엌, 마구간, 창고, 저장고, 학교, 교회 등이 있다고 한다. 얽히고 설킨 지하동굴에 한 때 약 5만 여명의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단다. 그만큼 광대한 지하의 땅굴 도시로 1983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데린쿠우는 '깊은 우물'이라는 의미로 지하 8층까지 내려갈 수 있는데, 환기 갱도를 설치하여 연기를 배출시키고 지상 위의 신선한 공기를 순환시켜 생활하였다고 한다. 적들의 침략에 대비하여 입구마다 연자방아 돌 같은 시설물을 설치하여 막을 수 있게 하였고, 연기 구멍을 사방에 뚫어 살고 있는 위치를 감추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으 흘라라 협곡-카파도키아 카파도키아로 가는 도중에 들린 으 흘라라(Ihlara) 협곡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평원 지대에서 화성암이 침식되어 생긴 협곡으로 그 생긴 모양이 우리나라 강원도 철원에 있는 한탄강 유역과 흡사했다. 다만, 그 규모가 매우 커서 장엄한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카파도키아 남쪽의 엘지에스 산(Erciyes)이 수차례 분화한 화성암이 침식되어 생긴 이 협곡은 길이 16km 골짜기에 이른다고 한다. 이곳은 고대 비잔틴 시대에 벌집 모양으로 뚫린 동굴들이 지하 거주지로 사용되어, 이 때문에 현재 중부 터키의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협곡을 따라 멜렌디즈(Melendiz) 개울이 흐르고 있어서, 쉽게 물을 구할 수 있고, 협곡 안에 동굴을 만들면 겉에서 잘 눈에 띄지 않아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탄압을 피해 이..
앙카라 노정 터키 여행을 하면서 생활패턴이 달라졌다. 시차 적응 문제는 접어두고 아침식사는 늘 5시나 5시 30분에 했고, 한 시간 뒤에는 어김없이 버스에 올라 투어를 시작했다. 하루 종일 대륙을 달리고 달리기 때문에 버스에서의 생활이 대부분이었다. 버스는 40인승 벤츠라 나무랄 데 없었다. 우리 일행도 많지 않아서 여유 있는 좌석을 활용할 수 있었다. 우리가 달린 여정은 장장 28,000km. 점심식사는 대부분 휴게소에서 오후 두 시경이었고, 투어 후 호텔에 도착하면 대부분 저녁 8시경, 식사를 하고 잠을 청해 보지만, 언제나 새벽 두세 시면 눈이 떠져 한두 시간을 뒤척이다 다시 잠들었다 기상시간에 맞춰 일어나는 것이었다. 호텔마다 와이파이 주소를 알려줘서 인터넷으로 어정쩡한 밤 시간을 소화할 수 있었다. 스마트 ..